본문 바로가기
실화다큐에세이

4부 9장

by 당당 2022. 1. 24.

9. 산과 하나된 신화

  5시에 정좌하고 앉아 녹차를 끓여 마시며 정신을 가다듬는다. 어젯밤 흡혈 진드기의 습격으로 이곳저곳에 반점들이 얼룩덜룩 붉어져 있다. 가려워서 자꾸 긁다보니 손톱에 긁힌 자국들이 영광의 상처처럼 온 몸에 그려졌다. 오늘은 야간산행을 감행해서라도 대청봉까지 21km를 걸어야 했다. 어제도 그만큼 걸어왔다. 설악산국립공원 권역에 들어서니 젖먹던 힘까지 올라온다. 오늘부터 3일만 더 걸으면 모든 일정은 끝난다.
  단목령에서 출발하여 강원도 인제군 기린면과 양양군 서면에 걸쳐 있는 점봉산(1,426m)으로 넘어가던 중 또 다시 무릅에 문제가 발생했다. 다리를 절둑거리며 평생 살아가야 할지도 모르겠다. 통증이 재발하여 더 이상 걷기가 힘들어졌다. 설상가상으로 불시에 찾아온 치통까지 나의 정신을 혼미하게 했다. 어금니도 빨리 뽑아버리고 싶었다. 갑자기 내 자신에게 화가 나기 시작하면서, 짊어메고 온 배낭을 산길에 던져버리고 주저앉았다. 주인 잘못만나 고생하는 이 몸뚱이, 내가 뭔 죄를 이렇게 많이 지었길래 그 고생을 감내해야만 하는걸까. 나는 죄를 짓지 않았는데, 어찌되었든 지은 죄가 많다는 이 불구된 영혼으로 다시 발길을 내딛어야만 했다. 누가 우리에게 지은 죄가 많다고 했던 것일까.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인간은 누구나 죄를 안고 태어난다는 말일까. 태어나 살면서 얼마나 죄를 짓는다는 것일까. 멀쩡한 사람을 죄인으로 낙인찍어 놓고 죄사함 받으라는 말은 도대체 무슨 의도일까. 죄라는 것이 불가피하고 천성적인 것이라면 사람이 어떻게 살든 죽어서는 자동탕감 되어야 한다고 항변하고 싶다. 기이하게도 고통이 커져갈수록 더욱 더 오기가 생겨나는 건 왜일까. 이 고통을 통해 죄가 많다는 이 육신의 중압감이 탕감될 수 있다면 맑은 영혼으로 거듭나길 바랄 뿐이다. 아픈 다리를 절룩이며 헐거워진 육신을 이끌고, 불멸의 영혼으로 설 수 있다는 믿음으로 다시 발길을 옮긴다. 몸도 마음도 정신도 영혼도 주인 잘못 만나 순례중에 고생 참 많이 했다. 이젠 사랑하고 아껴 주어야 할 때다. 우선 나 자신을 돌봐주어야겠다. 나를 사랑하지 않고 세상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겠는가. 자기를 사랑하지 않고서는 행복하고 평화로운 세상을 만날 수 없다. 나는 빛이다. 나의 빛이 드러나 세상의 빛과 하나되는 날이 올 것이다.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 이기적이라는 말은 거짓말이다. 자기 사랑이 먼저 이루어져야 다른 사람도 사랑할 수 있다. 조건없이 나를 사랑하는 것, 모두가 등을 돌릴 때에도 나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세상을 비추는 행복의 열쇠다. 이제부터 ‘나’ 사랑하기부터 시작할 것이다. 두려움없이 당당하게 내 자신을 사랑해야겠다. 지금 여기 존재의 중심에 서기만 한다면, 우리는 모두가 ‘하나’되어 천국의 문을 열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진실앞에 우리가 무지했던 건 내 안에 하나님의 씨앗, 또는 불성이라 할 수 있는 그 무엇을 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고, 그럴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우리가 신성을 잊어버린 사회에서 자랐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번 순례를 통해 나는 내가 얼마나 거룩하고 신성한 존재인가를 알아차리기 시작했다.
  
  점봉산(1,426m)에서 보니 설악산 서북주능선의 장대한 줄기가 중청봉과 대청봉으로 이어져 있다. 망대암산을 지나 한계령으로 가는 길목에서 즐비하게 널려진 기암괴석들이 우뚝 솟구쳐 올라 장관을 이룬다. 침니등반과 크랙등반도 감수하며 고난도 루트를 오르내리면서 한계령에 도착했다. 설악산의 빼어난 기암절벽들이 어둠에 잠길 무렵, 해드랜턴 불빛에 의지하여 대청봉 정상을 향해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아침 7시부터 걸었으니 16시간의 사투 끝에 20km를 걸어서 밤 11시, 대청봉 정상에 올라섰다. 아픈 몸으로 독기를 품은 채 걸었더니 기적같은 일을 벌어진 것이다. 하루종일 식사 한 끼 제대로 못하고 행동식만 먹으며 걸어온 것이었다. 대청봉에 올라서서 속초와 양양으로 이어져 있는 도시의 야경을 바라보니 너무 아름다워 보였다. 이제 이 아름다운 우리나라의 산하, 국토의 등뼈 백두대간과도 작별할 시간이 오고 있다. 언제나 내 꿈속에서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던 환영이와도 작별할 시간이다. 히말라야 설인이 된 그의 영원한 안식을 위해 나는 날마다 기도했다. 아직까지도 믿겨지지 않지만, 오랜 시간동안 나는 그와 함께 있었는데, 그는 어디로 간 것일까? 그는 내 안에 살아 있는데, 살아서 날마다 만나는데, 죽음이라는 건 착각이 아닐까? 그래, 나는 그렇게 믿어야만 한다. 죽음이란 착각이다. 댓재와 두타 청옥산에서 만났던 봉선생님께서 하신 말씀을 통해 나는 이제 죽음의 의미에 대해서 나름대로 정리를 할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정의한 죽음이란 숨이 멎은 상태의 생물학적인 죽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죽어서도 영원히 살 수 있는 영생의 길이 있다면, 윤회의 수레바퀴가 우리를 어디론가 데려간다면 죽음이란 삶의 또 다른 시작이 아닌가. 아직까지도 믿겨지지는 않는다. 그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그래도 이젠 환영이를 떠나 보내야 한다. 과거를 정리하지 않는다면 계속해서 지금 이 순간을 살지 못하고 전생을 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과거는 모두 전생이기 때문에 과거에만 매달린다면 오늘을 충실히 마중할 수 없다. 오늘을 온전히 마중하지 못한다면 나의 미래 또한 과거에 갇혀버리고 마는 것이다. 이번 순례를 통해 그와 나는 이미 하나가 되었다. 어쩌면 이미 하나였음을 인식하지 못한 무명(無明)의 세월에서 벗어난 것인지도 모른다. 그 앞에서 나는 부끄럽지 않은 모습으로 목숨걸고 순례에 임했다. 새로운 방향의 삶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라도, 이젠 구천에 떠돈다는 그의 넋을 편안히 보내야 할 때가 왔다.

  대청봉 정상 비석아래 철조망 앞에서 탠트를 치고 잠이 들었다가 5시에 눈을 떴다. 아무리 애를 써도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통증도 깊어지면 무감각해져 버리는지 이젠 별 느낌도 없었다. 탠트 문을 열고 누워서 떠오르는 태양을 기다리는데 중청대피소에서 올라온 사람들이 대청봉 정상을 가득 메우고 있었고, 구름바다 끝 운평선 언저리부터 붉게 타오르는 일출의 진광경이 시작되고 있었다. 자연을 사랑하고 산을 사랑하는 등산객들과 함께 대청봉에서 일출의 정기를 받고 있다보니 이번 순례의 성공적인 마무리를 축하받는 느낌이 들었다. 생일축하 케이크처럼 나를 축하하기 위해 붉게 떠오르는 태양도 동참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젠 다와 간다. 내일이면 진부령에 도착해서 모든 일정을 마치게 된다. 이제 이틀만 걸으면 되는 것이었다. 그래, 오늘도 초인적인 힘으로 걷는거다. 기진맥진해도 언제나 보이지 않는 손길이 내 몸을 일으켜 세워 걷게 해주지 않았는가.
  5월 중순임에도 불구하고 그늘진 둔덕의 결빙된 눈두덩들이 햇볕아래 수정처럼 빛나고 있다. 그늘 아래 숨어서 얼음처럼 빛을 발하며 따스한 봄의 순리를 거역하고 있는 것일까? 이미 지나가버린 겨울을 꼭 끌어안고 최후의 항전중이었다. 무너미 고개를 지나 공룡능선의 첫 봉우리에 올라서자 구름층에 살짝 봉우리를 걸치고 있는 울산암이 보였다. 온통 운해로 뒤덮여서 천상의 풍경을 연출하고 있었다. 동해에서 올라오는 구름들은 백두대간 산등성이를 넘지 못하고 골짜기 머물러서 모여 있었고, 설악산에서 주로 출현한다는 천연기념물인 금강초롱이, 바위틈에서 이슬을 머금고 드문드문 피어 있었다. 가장 위험한 구간이라는 공룡능선 릿지등반 지대를 통과하면서 절세의 비경을 간직한 주변 경관에 취해버렸다. 설악산 심장에 몰려든 운해를 바라보며 구름 위를 걷는 느낌으로 걷다가 신선이 된 듯 무아경에 빠져버렸다. 며칠 무리하게 산행을 했더니 마등령을 넘어 저항령 고갯마루를 넘어갈 때 코피가 터져 나왔다. 나는 휴지로 콧구멍을 틀어막고 지팡이에 의지해서 다시 걷기로 했다. 오늘도 미시령까지 20여km를 운행한다면 종착점인 진부령까지 하루만 남는 것이었다. 몸이 아파도, 체력이 바닥났어도, 걷는 기계가 되어 마지막 걸음을 재촉하며 미친 사람처럼 움직여야만 했다. 무릅과 어금니 통증이 심상치 않은 것이 아무래도 무언가가 잘못되어 가고 있었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나는 미쳐 있었다.
  그렇다, 나는 미쳤다. 이렇게 미쳐있는 그대로 남은 길을 가려고 한다. 내일이면 49일간의 백두대간 순례는 완성될 것이다. 한번뿐인 인생, 무언가에 미쳐서 살아보는 것도 괜찮은 일이지 않은가. 지금까지 걸어오면서 자연은 내게 말했다. 지금 이 순간을 살라고. 기웃거리지 말고 너 자신의 길을 가라고 말이다. 나는 그렇게 배우며 49일동안 순간 순간을 미쳐서 걸어왔다. 삶은 오직 한 순간의 ‘지금’을 마중할 뿐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미쳤다는 건 지금을 산다는 것이 아닌가. 이 대자연의, 이 우주의 경이로운 순간들을, 이 삶의 과정들을 옹글지게 깨어서 마중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지금 여기에서 평화로움을 만끽하며 행복을 선택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과거는 지나갔고 미래는 오지 않았다. 어제 일어난 일을 걱정하지 말고, 내일 일어날 일을 근심하지 말아야겠다. 나의 과거는 무죄다. 이 고백은 언제나 유효할 것이다. 무엇을 하든, 어디에 있든, 내 인생의 가장 놀라운 순간은 바로 지금 여기다. 나는 지금 여기 설악산 정령들의 보살핌과 운해에 둘러 쌓여 꿈속 길을 걷고 있다. 나는 지금 이 순간을 내 인생에서 가장 놀라운 순간으로 만들고 있지 않은가. 최선을 다해 걸어왔던 낙동정맥 백두대간 770km 산줄기에서 나는 나를 증명해냈다. 그 고난의 행군 속에서도 언제나 기쁨의 샘물을 건져 올렸다. 고난을 통해 얻은 값진 깨달음의 조각들, 그것이 바로 내가 백두대간 순례를 선택했던 이유였다.  

  1318봉 너덜지대를 지나서 미시령 휴게소에 도착했다. 휴게소 2층 기상관측탑 옆에 탠트를 쳤다. 동해의 구름층이 미시령 아래로 굽어보인다. 속초의 거대한 도시 불빛들이 구름층에 투사되어 하늘위로 오로라 띠가 형성되어 있었다. 속초지역을 덮은 안개구름층 위로 파랑과 초록이 뒤섞인 붉은 보랏빛 기둥이 솟구쳐 오르는 기현상이 연출되고 있었다. 하늘위로 승천하고 픈 도시의 야경빛이 구름기둥을 타고 오르다가 구름층에 막혀 흩어져 내리는 진풍경이었다. 버섯구름 형태의 보랏빛이 하늘을 수놓고 있었다. 나는 불현듯 산과 한몸이 된 것 같다. 아무도 가르쳐 주지않는 사랑을 산과 한 몸이 되어 익혀왔다. 산정에 올라 고독 속에서 몸서리를 칠 때마다, 산의 모든 정령들은 내게 다가와 친구가 되어 위로해 주었다. 나는 산과의 교감 속에서 산의 정령들을 마중했다. 잠 못드는 날에는 달과 별들이 하늘길을 밝히며 까마득한 우주이야기도 들려주었다. 내가 곧 우주임을, 우주가 곧 나임을 속삭여 주었다. 바람과 비와 산새와 풀벌레들도 나를 위로해 주었다. 그리움이 밀물처럼 찾아올 때 광대하게 펼쳐진 능선들이 일어서서 나를 감싸주기도 했다. 산이 나인지, 내가 산인지, 산과 나는 하나된 황홀감으로 어떤 아픔도 견뎌낼 수 있었다. 이제 산에서 배운 인내와 사랑을 품고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 집에 돌아가면 나는 모든 것을 넓은 아량으로 포용해 주어야겠다. 49일간의 이 경험이 나를 또 다른 길로 안내할 것이다. 하루만 더 걷자. 하루 남았다. 나는 그렇게 날마다 오늘 하루에 충실해 오지 않았는가.
  어쩌면 나도 신화를 써내려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지상에 꽃필 수 있는 불멸의 신화, 한편의 애절한 사연을 남기고 신화속으로 사라져간 환영이처럼 누구나 신화를 쓸 수 있다. 그런 신화가 없다면 사람들은 무엇 때문에 사는 것일까. 그런 신화가 없다면 사람들은 무미건조한 인생을 보내다가 사라지게 될 것이다. 어떤 희망도 사랑도 영원과 결합하지 않는다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 지상에 꽃피울 수 있는 영원한 사랑이란 있는 것일까! 이 세상에서 못다 이룬 꿈이 저 세상에서 이어져 결국 완성된다면, 나는 나만의 방식으로 내 인생을 만들어 가고 싶다. 미완성으로 남는다해도 내게 주어진 길을 찾아가고 싶다. 그 누구도 내 인생처럼 될 수 없는 고유하고 독특한 불멸의 흔적을 남기고 싶다. 모든 사람들은 그러한 능력이 있고, 그 능력대로 저마다 자기만의 길을 걸어가며 그러한 흔적을 남기고 떠날 수 있는 것이다. 자유로운 영혼! 자유로운 영혼으로 이 세상을 살아간다면 꽤 괜찮고 멋진 인생이 될 것 같다. 그래, 이제부터 가장 나답게 살기로 결심한다. 나로 살기다. 나 자신이 아니면 누가 될 수 있단 말인가? 진정한 자유를 맛보려면 주어진 내 삶에서 주인공으로 우뚝 서야한다. 백두대간을 이렇게 걸어왔듯이 어떤 삶의 현장에서도 최선을 다해 임하는 것만이 내 삶을 책임지는 일이다. 주어진 내 시간의 그릇만큼 순간순간 온전히 담아내면 되는 것이다. 어디를 보고 있는가. 내 삶의 주인공은 나다. 후회와 근심과 두려움으로 시간 끌기에는 내 인생이 너무 짧다. 얼마나 소중한 인생인데, 어떻게 태어난 인생인데, 허투루 살아갈 수는 없다. 남의 시선과 주변의 상황에 참된 ‘나’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기로 한다. 가장 나답게 사는 것이 무엇인지 결정해야 한다. 그래 다시 시작하자. 다시 걷자. 인생이란 이렇게 간단할 수 있는거다.

'실화다큐에세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에필로그]  (0) 2022.02.08
4부 10장  (0) 2022.01.24
4부 8장  (0) 2022.01.24
4부 - 7장 (참교육에 대하여)  (0) 2022.01.23
4부 - 6장 (노인봉산장과 동대산초소)  (0) 2022.01.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