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백두대간 순례중에 써놓았던 기록들을 어딘가에 숨겨 왔었다. 그 기억들을 영원한 침묵의 강 저편 기슭으로 띄워 보내고 싶었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나의 순례기록을 본다는 것이 얼마나 하잘 것 없고 부질없느냐는 생각에 들추어 낼 수가 없었다. 산 자의 안위를 위하여 죽은 자의 명성을 더럽히는 것 같았다.
까마득히 잊고 있었던 그 순례기록은 서랍 속 잡동사니를 정리하던 과정에서 27년만에 우연히 세상에 드러났다. 이 기록은 떠나보낸 그 악우(岳友)에 대한 슬픔을 잊기 위해 시작한 것이었다. 나는 천천히 그 기록들을 읽어 내려가며, 왜 숨겨왔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불귀의 객이 된 그를 히말라야 만년설 속에 묻어두고 돌아온 날부터 나는 그 기억에서 벗어나고자 노력했지만 항상 수포로 돌아갔다. 얼어붙은 계곡의 단호한 침묵, 나는 날마다 마음속 히말라야를 올랐다. 내 마음속 커다란 겨울산 하나가 나를 부여잡고 끝까지 놓으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한(恨)이 전율처럼 다가와 하루 하루 고통스런 시간을 보내다가, 그의 넋을 기리며 49일간 백두대간을 걷기로 했던 것이다.
이젠 가 닿을 수 없는 먼 발치에서 전설이 된 설인과 헤어져야 할 때가 왔다. 그에게 빙의(憑依)되어 살아왔던 스물셋 청년의 나로부터 풀려나와야 한다. 이 기록에 대한 마침표를 찍어야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이것으로 충분하다. 언제나 그랬듯이 죽는 날까지 나는 그와 함께 영원한 여행을 이어가게 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