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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화다큐에세이

4부 - 5장 (대관령아저씨)

by 당당 2022. 1. 23.

5. 대관령아가씨

 

고루포기산(1,238m)에서 능경봉과 대관령으로 가는 산길을 걷는 동안 꼭 꿈속 길을 걷는 줄 알았다. 산길 주변으로 핀 진달래밭 사이로 왜현호색과 나리꽃, 동의나물, 피나물, 제비꽃, 산괴불주머니, 그리고 이름모를 야생화 군락들이 흐트러지게 피어 있었다. 산기슭 전체에 야생화가 펼쳐진 봄의 향연이었다. 홀로 지켜봐서 더욱 아름다워 보이는 걸까. 군락을 이루어 흩날리는 꽃밭 사이를 거닐며 맛보는 이 기쁨, 이 아름다운 야생화 군락지를 함께 걸으며 마음나눌 누군가가 없음이 아쉬웠다. 사람들 손길에 닿지 않는 곳에서 형형색색 흩뿌려진 야생화가 나를 열렬히 마중해 주고 있었다. 그래, 우리 갈라서지 말자. 이름따위 몰라도 너희들은 하늘아래 피어난 지상 최고의 꽃들이다. 어쩌다가 이름을 얻게되면 너는 금낭화가 되고 나는 꽃초롱이 되어야 한다. 서로 다른 꽃으로 영영 갈라서야 한다. 이름모를 꽃으로 피어 너가 되고 내가 되자. 네가 필 때 내가 지고 내가 질 때 네가 피는거다. 우리 헤어지지 말고 그저 한송이 꽃으로 살아가자. 너도 꽃이고 나도 꽃이다. 꽃밭에서는 너도 꽃이 되고 나도 꽃이 되는, 우리는 모두 그냥 아름다운 꽃이다.

야생화의 열렬한 환영잔치에서 빠져나와 대관령휴게소에 도착했다. 휴게소에는 먹고 싶은 것들이 너무 많았다. 휴게소에 들어온 사람들 입속으로 들어가는 음식들을 보니 군침이 흘러 내렸다. 그들을 부러운 눈초리로 쳐다보다보니 참을 수 없는 식욕이 올라왔다. 또 다시 구걸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올라온 건 그 때였다. 산거지의 기본은 구걸이 아니던가. 지금 내게 창피하다는 생각은 낭비였기에 용기를 내야만 했다. 우선, 휴게소 안으로 들어가서 분위기를 보아야 했다. 식당 안으로 들어가 일하고 있는 사람들의 면면을 살펴보고, 그 중에 가장 인상이 좋고 선한 사람을 찾아 내가 공략할 타깃을 정확히 정해야 했다. 그들을 유심히 살피지 않는다면 퇴짜맞을 확률이 높아지기 때문에 대상 후보군들을 주의해서 관찰해야 했다. 식당 주방에는 너댓명의 아주머니들이 흰모자를 쓰고 무표정한 표정으로 일하고 있었고, 주문받는 카운터에는 두 명의 아가씨가 있었다. 그 중에 한 아가씨가 눈에 들어왔다. 얼굴에는 항상 미소를 띄우며 손님에게 인사하고 응대하는 모습이 보였다. 카운터에서 손님들의 주문에 따른 메뉴를 발주해 주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가장 만만한 타깃이 내 눈에 들어왔다. 멀찍이 서있었던 나는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보라색 정장차림의 휴게소 유니폼을 입은 그녀는 더욱 아름답고 빛나보여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그녀 앞에 서는 순간, 가슴이 두근거렸고 말문이 막혀버렸다.

 

저기요나는 수줍은 듯 말했다.

 

저기.... 제가.... 지금 돈이 없어서 그러는데.... 너무 배가 고파서 그러는데... 부산에서부터 지금까지 산줄기만 따라서 걸어왔는데.... 한달 넘도록 변변히 먹지 못해서 그러는데...”

 

그녀 앞에서 말문이 막혀버리는 바람에 겨우 입을 열었지만, 몇 마디 말조차도 오랜 시간 질질 끌 수밖에 없었다. 좀 더 자세하게 내 입장을 설명하고 싶었는데 내 말들은 떨려 나왔고 더듬거리고 있었다. ! 내가 이렇게 초라하고 비참한 모습으로 그녀앞에 서서 얼어버릴줄은 몰랐다. 왜 말문이 막혔는지는 모르겠지만 말더듬이처럼 어눌하게 사정을 구하는 어리바리한 모습에 오히려 그녀는 웃음을 터뜨렸다. 한참을 내 앞에서 웃더니 더 설명하지 않아도 된다는 듯이, 다 알아들었다는 표정으로 내 말을 끊으며 대답했다.

 

잠시만요. 사장님에게 물어봐 드릴께요. 저기에 잠시만 앉아계세요.”

 

그녀는 하던 일을 중단하고 식당 안에 있는 한 아주머니에게로 갔다. 그녀가 왜 내 말을 끊고 웃기만 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절반의 성공은 이룬 것 같아 가슴을 쓸어내리기만 했다. 한참을 서성거리며 기다렸더니 주방안에 들어갔다가 나오는 아가씨가 웃으면서 내게 다가왔다. 나는 긴장하고 있었지만, 그녀는 밝게 웃고 있었다. 눈웃음을 치며 다가오는 그녀의 눈빛에 내 마음은 나비처럼 훨훨 날아올라 흔들렸다. 이미 내 마음을 사로잡아버린 그녀, 나는 그녀의 포로가 되어 물끄러미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그녀는 너무 예뻤다.

 

뭐 드시겠어요. 사골우거지국 드리면 될까요?”

 

. 뭐든지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눈썹 화장과 립스틱 이외로는 화장끼가 거의 없었던 그녀는 딱 내 취향이었다. 순수하고 상량한 모습이 내 마음을 통째로 흔들고 있었다. 그 때 왜 크리스탈처럼 맑고 순진해 보이는 아가씨 앞에서 욕정이 솟구쳤는지는 모르겠다. 얼마 전에는 몽정을 하는 바람에 팬티를 갈아입느라 순례가 늦어진 경우도 있었다. 아무래도 내 몸속의 남성호르몬이 비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이런 늑대같은 맘을 가진 나에게 그녀는 맘을 열어줄 수 있을까. 더군다나 40일 넘게 산에서 생활해왔던 내 모습에 어느 여자가 관심을 줄 수 있겠는가. 그래도 나는 그녀 앞에서 흔들리는 내 마음을 단단히 붙들어 맸다. 그녀는 거침없는 손놀림으로 키보드를 치더니 사골우거지국 영수증을 끊어 내게 건네주었다. 꿀먹은 벙어리처럼 감사하다는 말 한마디 하지 못하고 돌아서서, 받아든 전표를 식당 부엌에 제출했더니 바로 밥상이 차려졌다. 순식간이었다. 사골우거지국은 커다란 가마솥에서 끓고 있었고, 반찬들은 이미 종지그릇에 담겨져 있었다. 공짜밥이 바로 차려지니 그녀가 직접 쟁반에 담아 가져왔다. 나는 목례(目禮)를 하고 밥 한술을 뜨기 시작했다. 사골우거지국과 함께 나온 찰진 밥을 먹으면서 갑자기 눈물이 핑 돌았다. 너무 허기가 져서 그랬는지, 그 무엇으로도 표현할 수 없는 지상 최고의 맛이었다. 이렇게 맛있는 음식들을 먹지 못하고 인스턴트 식품으로만 끼니를 때워 왔으니 내 몸은 얼마나 이 맛을 잊고 있었던가. 그런 인스턴트 음식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황홀한 맛이었다. 나는 왜 날마다 맛볼 수 있는 이런 맛을 외면하고 이 긴 순례길을 걸어야만 했을까. 원초적인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이 맛의 행복을 저버리고 고생스럽게 뭐하는 짓이던가. 이번 순례가 끝나면 세상의 모든 맛집들을 여행하리라 마음먹으며 스스로를 다독이며 위안해 주어야만 했다.

식사를 마치고 나는 화장실로 달려가서 부리나케 단장을 해야 했다. 그녀에게 다시 다가가서 대화를 나누고 싶었기에 일이 좀 급해졌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보니 검은 줄무늬 때가 얼굴과 목 주위에 붙어 있었다. 며칠 째 변변히 닦지도 못했으니 당연한 결과였겠지만, 길거리를 어슬렁거리며 배회하는 노숙자의 그 모습과 똑 닮은 모습이었다. 우선 비누도 없이 물로만 머리를 감고 세수를 했다. 거울을 보면서 산만한 머리숱을 뒤로 쓸어넘겨도 보며 머리손질을 해보았지만, 머리카락이 떡져서 뭉쳐나와 헤어스타일이 영 마음에 안들었다. 잘 생겨 보이기 위해 거울을 자세히 들여다보며 매무새를 가다듬어 보았지만, 붉게 탄 얼굴은 정말 아프리카 원주민 같았다.

그래도 나는 용기를 내어 다시 식당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배낭 속 수첩 사이에 있는 마른 꽃잎들을 꺼냈다. 지난 20일간 산행중에 모아 말린 야생화 꽃잎들 15종이었다. 여러 가지 모양의 야생화 꽃잎들을 그녀에게 선물하고 싶었다. 내겐 아주 소중한 1호 재산이었지만, 카운터에 있는 아가씨에게 다가가 감사의 선물이라며 내 마음을 전해 주기로 했다. 하지만 그녀앞에 서자마자 이내 다시 내 몸은 얼어버리고 말았다.

 

, 저기요.... 아가씨.... 맘에 드는데혹시 몇 살이세요

 

나는 그녀앞에 다가서자 말을 잇지 못하고 또다시 얼버무렸는데, 그 바람에 그녀의 함박웃음을 또 다시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 옆에 있던 아가씨까지 박장대소가 떠져 나왔다. 지금 나는 순례중이기 때문에 누추해 보이는 것이라고 항변하고 싶었지만 그조차 말이 터지지 않아서 선물만 불쑥 내밀 수밖에 없었다.

 

어머? 이게 뭐예요? ! 야생화 곷잎이네요. 감사해요. 너무 예뻐요. 잘 받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여행 잘 마무리 하세요.”

 

마른 야생화 꽃잎 화집을 받아 든 그녀는 내게 웃어주며 인사했다. 그녀의 웃는 모습은 정말 너무 예뼜다. 지금의 내 선량하고 순수한 마음을 그대로 받아주고 이해해주길 간절히 기도하며, 뿌듯하고 당당하게 돌아서서 헤어졌다. 뒤돌아서서 퇴장하면서도 그녀가 웃을 때 뽀얗게 들어가는 보조개가 뇌리에 여운을 남기며 스쳐 지나갔다. 매력적이고 천진난만한 그녀는 정말 사랑스러웠다. 걷는 내내 그녀 생각을 하면 할수록 힘이 나고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하지만 이대로 이 길을 가게 되면 영영 그녀를 볼 수 없다는 막연한 불안감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또 다시 만날 수 없다는 그 초조함이 나를 집어삼키더니 대관련 푸른 초원에서 갑자기 무기력해지고 힘이 빠져버렸다. 전화번호라도 물어봐야 했는데 깜빡하는 바람에 못내 아쉬움이 남았다. 대관령 목장을 넘어가던 길목에 주저앉아 망연자실 하늘만 바라보다가 그녀에 대한 망상이 사그라들 즈음, 비로소 나는 다시 걸음을 재촉할 수 있었다.

선자령 가는 길에 탠트를 쳤다. 대관령 목초지엔 아름다운 전경이 펼쳐져 있었다. 밤기온이 떨어져서 옷을 세 겹이나 껴입고 침낭속으로 들어갔지만 추운 것은 마찬가지였다. 5월초임에도 불구하고 요즘에는 기온차가 심해져서 자다말고 추위에 떨다가 깨는 날이 많아졌다. 오늘은 어제보다 더 추운 것 같았다. 침낭속에 들어가 뒤척이며 온통 대관령휴게소 아가씨만 떠올렸다. 그녀의 미소 가득한 맑은 눈빛을 나는 잊을 수가 없다. 그의 친절은 내 상상속에서 나를 사랑한다는 고백처럼 보였다. 나에게 기회가 주어진다면 나는 그녀와 연애를 하고 싶다. 외로움에 불타는 이 가슴을 그녀가 받아주었으면 좋겠다. 그녀도 함께 이 길을 걷는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녀에게 내가 만난 달과 별들의 이야기를 들려 싶다. 밤낮으로 운행되는 우주의 이치를 알려주고 싶다. 비와 바람과 숲의 적막과 새들과 풀벌레들의 비밀을 들려주면 그녀는 나의 진면목을 알게 될까? 그렇지 않다면 그녀의 심금을 울리고 감동시킬 수 있는 것들은 또 무엇이 있을까? 나는 몽상속에서 혼돈의 도가니에 빠져들어 갔다. 왜 그녀의 전화번호를 묻지 못했을까 하는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억울하고 괴로워서 잠에 들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