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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화다큐에세이

4부 - 4장 (어버이날 담배사건)

by 당당 2022. 1. 23.

4. 어버이날 담배사건

 

아픈 다리를 잘 돌보지 못하면 평생후유증을 안고 살아갈 수 있을 것 같다는 암울한 예감이 밀려왔다. 마침 아침부터 탠트를 두드리는 빗소리가 고막을 울려왔기에 침낭위에 누워서 다시 성경책을 꺼내들었다. 지쳐있는 내게 비는 언제나 쉬어갈 명분과 게으름을 피울 핑계거리를 제공해 주었다. 다리는 절뚝거렸지만, 지금까지 40일이나 걸어왔고 며칠 남지 않았기에 포기할 수도 없었다. 오늘도 두 나무지팡이에 의지한 채 느즈막히 출발해서 중간 중간 쉴 때마다 다리 마사지를 해주면서 대화실산을 넘어 들미재와 석두봉까지 평퍼짐하고 정감어린 산길을 걸었다. 조금만 힘을 내자며 스스로를 토닥여주며 하루종일 지도상 12km를 걸어 화란봉지나 닭목재까지 왔다.

닭목재에도 산신각이 세워져 있었는데, 처마 밑은 탠트칠 공간이 확보되지 않아 문이 잠겨있지 않은 산신각 안으로 들어갔다. 눅눅한 황토흙 바닥과 백년은 묵어 있는 먼지들과 거미줄이 뒤엉켜 있어서 그런지 실내가 좀 음산하고 칙칙했다. 제사장 위에 모셔진 3개의 비석이 눈에 들어왔는데 거미줄이 많은 것을 미루어 추측해보니, 오랜기간 방치되어 있었다. 설마 오늘 밤 산신들이 찾아와 내 목을 조르지는 않겠지? 그건 정말 비겁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어차피 인정사정없이 내달려온 인생, 죽음도 두렵지 않은 내가 산귀신쯤이야 겁낼 일은 아니었다. 간밤에 온갖 잡신들이 나 혼자만 있다고 괴롭히지 않기를 기도했다. 성경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하나님의 존재를 생각하기 시작한 건 다행스런 일이었다. 이럴 때에는 성경책과 십자가가 그들을 몰아낼 것이라 믿어야 한다. 비를 피할 수 있는 장소가 여기 뿐이었기 때문에 탠트를 설치하지 않고 실내에서 매트리스와 침낭만 깔고 자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으슥하고 썰렁한 닭목재 산신각에서의 비박을 하기로 결정한 후, 먼지 쌓인 주변을 정돈하고 구석에 쳐박혀 있는 돗자리를 끄집어내어 냉기가 올라오는 흙바닥에 깔았다.

주변은 온통 안개가 뒤덮인 상태로 비가 내리고 있어서 으스스한 분위기였다. 갑자기 담배가 피고 싶어져서 코펠에 밥을 얹혀놓고 아스팔트 도로 쪽으로 나갔다. 지나가는 차를 세워 담배를 구하기 위해서였다. 이 곳 415번 국도는 서쪽 골짜기 사람들이 닭목재를 넘어 강릉으로 가는 도로다. 운이 좋으면 지나는 차량을 만날 수 있기 때문에 비를 맞아가면서 도로가에 서성거렸다. 십여분이 흘렀을까, 예상대로 승용차 한 대가 강릉으로 넘어가려고 닭목재로 오고 있었다. 안개낀 도로변에서 어정쩡한 자세로 위험하게 서서 손을 흔들었다. 달려오던 한 대의 승용차가 나를 확인하고 멈춰 섰다. 비가 오고 있었기에 운전석에 앉아 있던 아저씨는 창문도 열지 않고 빨리 타라는 손짓을 했다. 내가 타기만을 기다리는 것 같았다. 나는 단지 담배 한 개비만 얻고 싶었는데 난처한 상황이 발생했다. 그래서 가까이 다가가 조수석 창문을 두드렸다. 자동창문이 열리면서 운전사는 왜 빨리 타지 않느냐고 성질을 부리셨다. 담배 한 개피만 필요할 뿐이라고 말했더니 어안이 벙벙해진 아저씨는 어리둥절해 했다.

 

없어! 이 미친 놈아! 세상에 별 미친 놈 다 보겠네. 에이 재수없어!”

 

아저씨는 대뜸 짜증을 내면서 내게 욕지거리를 퍼부었다. 그러고는 다시 창문을 닫고 급하게 출발해 버렸다. 운전사 아저씨가 왜 그런 반응을 보였는지 한 편으로는 충분히 이해되기도 했다. 한바가지 욕을 먹고 졸지에 미친놈이 되어버린 나는 오히려 소리내어 크게 손뼉치며 박장대소하고 말았다. 이 상황은 내가 입장을 바꿔 생각해봐도 이해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몰골이 허접한 젊은 사람이 이 깊은 산중에서 귀신처럼 비를 맞고 서있었으니 얼마나 당황했겠는가. 그런 사람이 어이없게도 대뜸 한다는 말이, 담배 한 개비만 달라고 하니까 그 누가 황당해 하지 않겠는가. 욕을 먹어도 아무렇지 않은 상황이었음을 인정해야 했다. 하지만 욕을 먹고나니 더욱 오기가 생겨서 꼭 담배를 피워야겠다고 벼르며 도로가에 계속 서 있기로 했다. 한번 실패했다고 포기할 내가 아니었다. 지금 이 순간 담배 이외로는 내게 아무것도 필요치 않았다. 또 다시 10분 가량을 기다렸더니, 이번에는 1톤 트럭이 도로를 넘어왔다. 느낌이 좋았다. 트럭이라면 분명 농업하고 관련이 있을테고, 농사꾼들은 대부분 담배를 태우는 분들이 많았기 때문에 그만큼 담배를 얻을 확률이 높았다. 내 예상은 적중했고, 농사일을 하고 있던 아저씨가 트럭을 멈추고 담배 3개비를 주고 떠나셨다. 결국 이 깊은 산중에서의 담배구하기 프로젝트는 대성공을 거뒀다. 나는 신나서 다시 돌아와 산신각 문지방에 걸터앉아 담배를 태웠다. 술마신 사람처럼 어지럽고 세상이 빙글빙글 돌더니 눈물이 핑 돌았다. 놀이공원에서 롤러코스트 타는 기분이었다. 공간이동 게임하듯 딴 세상으로 넘어가는 것 같았다. 사물의 초점을 맞추느라 안간힘을 써도 소용없었다. 마약이 이런 환각상태를 유발한다고 하는데, 나는 담배 한 개비로도 그런 효과를 톡톡히 보고 있었다.

비가 내리는 산신각 처마 밑에 홀로 앉아 적막속에서 라디오를 켜니 오늘은 일년에 한 번 찾아오는 어버이 날이란다. 라디오 DJ가 부모님께 카네이션을 달아 주었냐고 물어 왔다. 그러면서 DJ는 팝송 한곡을 선곡하여 들려주었는데, 감미로운 그 노래의 가사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후회하는 아들의 애절한 사연을 담은 내용이었다. 문득 나는 나의 아버지가 뇌리를 스치자 아버지가 얼마나 불쌍하고 가련한 사람인지 떠올렸다. 6.25 전쟁 고아로 살면서 얼마나 사랑받지 못하고 자랐을까. 4남매를 키우다가 5.18 때에는 삼청교육대에 끌려가서 고문과 구타에 죽다 살아온 피해자가 아니었던가. 죽음의 사선을 넘나들던 그 삶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외로웠을까. 사람받지 못하고 자란 아버지 인생을 아무도 위로하고 보살펴주지 못했던 건 아니었을까. 갑자기 가슴 속 깊이 아버지를 끌어안고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어졌다. 아버지 살아계실 때 평생 씻을 수 없었던 그 상처와 아픔을 치유해 드리고 싶어졌다. 돌아보니 아버지는 나를 사랑하셨다. 아버지는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이 좀 서툴렀을 뿐, 사랑의 또 다른 모습으로 내게 나타난 분이었다.

간밤에 부모님 꿈을 꾸었다. 아버지가 술 마시고 어머니를 때리는 장면이었다. 어머님을 생각하면 속이 쓰리다. 나에게는 아버지에 대한 사연이 있다. 어찌보면 나는 불효자다. 내가 왜 이렇게 산에 미쳐 살게 되었는지, 이 모든 게 아버지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폭력적인 아버지로부터 벗어나고 싶어서였다. 아버지는 술만 마시면 어머니를 때렸다. 한주가 멀다하고 어머니에게 폭행을 휘둘렀다. 어린시절, 나는 그 모습을 지켜보며 공포에 떨 수 밖에 없었다. 술에 취하지 않았을 때 아버지는 사랑이 넘치고 인자했지만, 술에 취하면 주사를 부렸다. 그 술버릇 때문에 나는 아버지를 싫어했다. 중학생 때에는 이혼하라고, 매맞지 말고 자유롭게 도망가서 살자고 어머니에게 여러차례 애원하고 매달려 보았지만, 그럴 때마다 어머니는 완강히 거부했다. 이유는 단순했다. ‘자식들 결혼할 때까지였다. 4남매 출가시킬 때까지 이혼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애비없는 자식이라는 손가락질을 받게 할 수 없다는 확고한 신념이 있었다. 그렇게 날마다 온몸에 멍들어 살면서도 자식들 미래를 걱정하며 견뎌낸다는 것에 난 결코 동의할 수 없었다. 나는 어머니가 구타당할 때마다 복수심에 칼날을 갈았다. 가출을 하려고도 했지만, 어머니가 걱정되어 여러번 포기도 했었다. 어머니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고등시절을 보내야 했다. 미성년을 벗어나서야 비로소 그렇게 아버지로부터 벗어나 야반도주하듯 도망쳐 나와서 살아온 4. 나에게 아버지란 생물학적인 아버지일 뿐이었다. 부자(夫子)간의 관계는 끝나 있었다. 하지만 아버지를 증오할수록 아버지의 다혈질적이고, 즉흥적이고, 직선적인 성격까지 닮아있는 내 모습과 마주할 때가 있었다. 아버지를 원망하면서도 내 안에 살아계신 아버지 모습에 깜짝 놀랄때가 많았다. 나는 아버지의 기질과 성향 등을 많이 닮아 있었다. 내가 그토록 미워했던 아버지로부터 도망쳐 나온 4년 동안에도 아버지는 내 안에서 살고 있었던 것이다.

어찌보면 아버지도 불쌍한 분이었다. 아버지는 9세 때부터 6.25 전쟁고아로 살아오며 세상에 버려진 피해자였다. 갓 스무살이 되어 한 살 어린 열아홉 어머니를 만나 가정을 꾸려 자수성가(自手成家)해 왔는데, 1980518일 광주항쟁이 터지면서 평생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으셨다. 그때는 내가 초등학교 2학년 때로 기억한다. 군부독재가 들어서면서 아버지는 동네에서 경찰들에게 붙잡혔고, 그들은 아버지를 어디론가 끌고갔다. 531일 전국비상계엄 상태에서 법원의 영장 발부없이 체포되어 붙잡혀 간 것이었다. 그리고 전두환 정권에서 군법회의에 넘겨졌고,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가 사회정화정책이라며 아버지를 순화교육 A급 대상자로 분류했던 것이다. 마을에서 누군가의 모함과 밀고에 누명을 쓰고 이유도 모르고 잡혀간 것이었다. 아버지와 우리 가족에겐 평생 돌이킬 수 없는 사건이었다. 지독한 고문과 구타에 순화교육 대상자 4만명 중 살아 돌아온 사람은 거의 없었다. 대부분이 죽어서 생사를 알 수 없었고 시신조차 확인할 수 없었다. 특히 A급 교화대상자는 거의 죽었다. 동네에서도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4남매를 홀로 보살피던 어머니는 날마다 눈물을 삼켜야만 했다. 그래도 아버지는 기적적으로 살아 돌아왔다. 죽은 시체와 다름없이 몰골이 상접한 채 돌아왔다. 무고한 누명을 쓰고 삼청교육대에 끌려가 죽도록 얻어맞고 나왔다. 함께 들어갔던 사람들은 모두 죽었다는데 아버지는 운좋게 목숨을 건졌다고 했다. 살아 돌아온 것만으로도 천운이었다. 나는 그 때 아버지가 몇 달동안 거동도 하지않고 시체처럼 방에만 누워 있었던 것을 기억한다. 어머님은 병원에 입원시킬 형편이 못되어 대소변까지 받아내며 간호했다. 1년여의 회복과정을 보낸 후, 아버지는 불구된 몸으로 살아야 했다. 아버지는 슬픈 한국현대사의 피해자였다. 그 때부터 아버지는 술독에 빠져서 팽생을 살았다. 트라우마를 지우기 위해, 국가에 대한 분노심을 가라앉히기 위해, 억울한 심정을 술로 달래며 마시고 마셨다. 고아가 되어 단 한번도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했던 아버지, 이를 악물고 행복한 가정을 꾸려 열심히 살아보고 싶었던 아버지, 누구보다도 자식들에게 잘 해주고 싶었던 아버지의 꿈은 박살이 나고 말았다. 살림살이를 부수고 집어던지며 어머니를 때리던 버릇은 그 때부터였다. 억울한 누명을 쓰고 삼청교육대 희생자가 되어야 했던 아버지가 살아 돌아와 세상에 불을 지르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 대상은 가장 소중하고 연약했던 가족 구성원들이었다. 가족들은 저항할 힘도 없이 공포의 도가니에 갇혀 살아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