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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화다큐에세이

4부 - 3장 (기도원 할머니)

by 당당 2022. 1. 21.

3. 삽당령 기도원 할머니

 

너무 추웠기 때문에 잠을 잘 수 없어 새벽 4시에 버너불을 켜고 몸을 녹였다. 깊은 밤중에도 탠트 밖 주변이 환했다. 심코 탠트문을 열어보았더니 보름달이 밝게 빛나고 있었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위로 보름달이 주변을 비추고 있었던 것이다. 밤새도록 나의 곁에 머물러 있었을 보름달은, 내 마음을 따뜻하게 감싸주고 있었다. 보름달만 보면 가슴이 두근거리고 애틋한 감정이 몰려온다. 저무는 보름달을 지켜보며 차를 끓여 마셨다. 여명이 드리워지면서 어둠이 물러가기 시작했고 산굽이마다 산안개가 자욱하게 들어차 운해의 장관이 연출되고 있었다. 망망대해에 몇 개의 봉우리들만이 섬처럼 떠있을 뿐, 골깊은 계곡과 계곡 사이에 안개구름들이 온통 들어차서 백두대간을 휘감는 장면이 연출되고 있었다.

백봉령에 도착하여 휴식을 취한 후 자병산으로 향했다. 자병산 일대는 임계카르스트 지형이었다. 석회암이 녹아서 형성되는 카르스트(karst) 지형은 산간지방에서 주로 볼 수 있다. 강원도의 영월, 평창, 삼척과 충북의 제천, 단양 등지에 발달되어 있지만, 이곳 자병산이 국내 최대 면적의 석회암 채취장이. 석산개발사업으로 인해 지도에 표기된 백두대간 산줄기가 끊겨버려, 산이 통째로 사라져버린 유일한 곳이기도 하다. 한라시멘트에서 수년간을 채석을 하면서 산 전체를 날려버렸다. 자병산 일대가 통째로 깍여 나가서 곧 자병산은 그 자취를 감출 것 같았다. 석회암을 잘게 부숴버리는 거대한 파쇄기계의 소음은 굴삭기와 트럭엔진 소리가 범벅되어 자병산 전체에 메아리로 펴져 나가면서 우렁차게 울리고 있었다. 이대로 내버려 두었다가는 백두대간의 허리가 완전히 잘려나갈 것이라는 암담한 생각이 들었다. 이 무지막지한 환경파괴의 현장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이 무자비한 만행을 멈추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나는 백두대간의 중추적인 맥을 잇고 있는 자병산이 지도상에서 사라진다는 것에 동의할 수 없었다.

 

아무래도 오른쪽 발목과 무릅이 심상치 않다. 댓재에서 두타산 청옥산으로 봉선생님을 만나러 가던 그 때 무리하는 바람에 화근이 된 것이 분명했다. 무릅관절과 발목 통증이 그때부터 점점 심해지기 시작했으니까. 얼떨결에 20km 이상 걸었으니 무리했음직도 하다. 그래도 봉선생님을 만나고 내안의 화두가 더욱 선명해졌다. 바게트 빵 반쪽을 먹고 탠트 밖으로 나가려니 오른 발목과 다리에서 시작되는 통증이 허리와 등뼈까지 타고 올라왔다. 나는 다시 주저앉고 말았다. 도저히 운행할 용기가 나질 않았다. 그렇다고 운행을 중단하고 병원에 갈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무조건 걸어야 했다. 이제 열흘 정도만 참으면 순례를 마칠 수 있기 따문에 이 고통을 이겨내야 했다. 한참동안 휴식을 취한 후에 절룩거리며 다시 걷기 시작했다. 두 시간 정도 이를 악물고 걷다보니 눈앞이 캄캄해져 옴이 느껴졌다. 더 이상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어제도 자병산 근처 산자락에서 혼자 기절해서 죽다 살아났었는데, 오늘도 쓰러지면 다시 살아날 것 같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결국 우여곡절 끝에 삽당령에 도착하고 나서야 나는 마음 놓고 주저앉아 버렸다. 하나님은 견딜 수 있을 만큼의 시련을 주신다는 대천덕 신부님의 말씀이 떠올랐다. 신부님을 만난 이후부터는 육체적인 고통이 찾아올 때마다 고통에는 늘 고상한 목적이 있다는 말을 곱씹게 되었다. 신부님이 말씀한 고통속에 숨겨진 하나님의 선물이 무엇인지 그 비밀을 조금씩 알아가는 느낌이었다. 삽당령에서 멍하니 넋놓고 쉬다가 주능선 바로 왼편으로 흐르는 계곡으로 가서 목욕을 했다. 계곡속에 들어가 스트레칭 하듯 물장구치면서 다리근육을 풀어주었다. 다리를 주무르고 맛사지도 해주면서 물장구를 쳤다. 오후 5시가 넘어가면서 태양열도 한 풀 꺽이고 있었다. 그늘진 계곡물 속에서 물장구치며 맛사지 하듯이 다리를 풀어주니 통증도 완화되어 갔다. 내게는 축복의 시간이자 회복의 시간이었다.

계곡 건너편에 삽당령기도원이 보였다. 이 깊은 산중에 집터라고는 삽당령 기도원 딱 하나였다. 이 기도원은 백두대간 주능선길에서 아주 가까이 있었다. 계곡물놀이를 마치고 나와 다시 산으로 가던 길에, 삽당령기도원 대문 밖으로 나오는 할머니와 눈이 마주쳤다. 등짝이 꼬부라진 꼽추할머니였는데, 지팡이도 없이 굽은 등을 억지로 세워가며 나를 뚤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아주 왜소한 체구였다. 나는 가까이 다가가서 큰 소리로 안녕하세요하며 인사를 드렸다. 할머니는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총각은 어디서 왔네?”

 

, 저는 부산에서부터 산길만 타고 걸어왔어요. 집은 인천이예요.”

 

근데 여긴 왜 왔네?”

 

할머니, 죄송한데요, 혹시 밥 좀 얻어먹을 수 있을까요?”

 

밥을 안먹었네?”

 

, 아직 밥을 안먹었어요.”

 

그래, 위키 온라인, 위키 온나. 밥먹고 가야제. 밥줄게

 

할머니 말씨에는 강원도 강릉사투리가 섞여 있었다. 할머니는 기도원 안으로 나를 들이고 식탁에 앉히셨다. 식탁 옆으로는 냉장고와 압력밥솥이 놓여져 있었다. 둥글게 굽은 허리를 세워서 능수능란 손놀림으로 단 몇 분만에 밥상을 차려 내셨다. 찬밥과 된장국, 김치반찬을 내놓는 솜씨가 부드런 바람처럼 자연스러웠다. 주름살과 백발머리를 보면 팔순은 넘겼을 것 같은데, 말투에는 힘이 실려 넘쳐났다.

 

움메나 배고플껴. 쿤내가 좀 나드래도 위키 먹그래. 마니 먹으라니. 왜 집떠나 고생함매 고생을

 

할머니는 깊이 패인 주름살과는 달리 정신은 멀쩡했고, 내가 하는 말도 잘 알아들었다. 간혹 알아듣지 못하는 강릉사투리가 섞여 있었지만 말도 청산유수(靑山流水)였다. 밥을 먹고난 후, 할머니의 허락하에 김치를 비닐봉투로 싸서 챙겨 넣었다. 그리고 식탁에서 일어나려 했을 때, 할머니는 내 손을 꼭 붙잡으며 말했다.

 

총각! 하나님을 믿어야 해.”

 

순간 잠시 당황했지만 할머니는 담배갑만한 작은 책자를 내 손에 쥐어 주면서,

 

이 책 파득 보게 시리. 잘 읽어 보시라우. 이거 읽으면 할망구 울메나 좋것잖소.”

 

할머니가 건내 준 손바닥만한 소책자를 훑어보니 깨알처럼 작은 글자가 적혀있는 신약전서 4대복음서였다. 평상시라면 종교를 강요하는 사람들에게 거부감이 있었지만, 지금 상황은 담배값만한 소책자만 선물로 받으면 되는 것이었다. 문득 할머니의 하나님에 대한 확신은 어디서 오는 걸까 궁금해 졌다. 뭐라고 말로 표현은 못하셨지만 할머니에겐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과 절대적인 믿음이 있었다. 하지만 맹목적인 기복신앙은 어느 순간 사람과의 관계를 단절시키고, 세상으로부터의 고립을 자초하기도 하기 때문에 조심해야 할 부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감사인사를 드리고 책을 받아 문 밖으로 나왔다. 할머니는 대문 앞까지 마중 나오면서 간곡한 어조로 내게 다시 부탁을 하셨다.

 

총각! 하나님을 믿어보시우야. 꼭 부탁하우. 하나님 믿으면 천국갈끼래.”

 

신앙심이 깊은 이 노파의 전도방식은 대천덕 신부님의 그것과는 좀 다른 방식이었다. 특별한 설교를 하는 것도 아니면서,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으로 내게 그 확신을 심어주고 싶었던 것이다. 손바닥만한 작은 성경책을 받아든 나는 이번 기회에 신약성서 4대복음서를 정독해 봐야겠다는 굳센 의욕이 생겨났다. 그리고 탠트 안에서 촛불과 해드랜턴을 켜고 시간가는 줄 모르고 성경책을 읽어 내려갔다. 예수의 말씀과 행적이 한 편의 경쾌한 드라마처럼 흘러갔다. 기적을 보인 장면들은 믿기 어려웠지만 그럴수도 있겠다며 그러려니 생각했다. 단 한번도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던 내게 성경에 대한 관심을 끌게 한건 아마 대천덕 신부님의 영향이지 않을까 생각했다. 성경책을 읽으면서 무수히 생소한 외래어와 문어체들이 낯설고 지루했지만, 사이사이에 간혹 가슴에 와닿는 문구들이 있었기 때문에 책장을 넘기기엔 무리가 없었다. 누가복음까지 읽어내려 가다가 다음과 같이 적힌 문구를 발견하고 몇 번씩이나 다시 읽어가며 가슴에 새겨 넣기도 했다.

 

네 눈은 몸의 등불이다. 네 눈이 성하면 네 온 몸도 밝을 것이요, 눈이 성하지 못하면 네 몸도 어두울 것이다. 그러므로 네 속에 있는 빛이 어둡지 않은지 살펴 보아라. 네 온몸이 밝아서 어두운 부분이 하나도 없으면, 마치 등불이 그 빛으로 너를 환하게 비출 때와 같이, 네 몸은 온전히 밝을 것이다.(누가1133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