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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화다큐에세이

4부 - 1장 (대천덕 신부님)

by 당당 2022. 1. 21.

[4: 내 안의 빛을 밝히며]

 

1. 예수원 대천덕 신부님

 

오늘부터 백두대간 주능선길이 시작된다. 이른 아침, 여관방에서 지인이와 헤어진 후, 통리역에서 들려오는 기적소리를 뒤로하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어제 하루 휴식일을 보냈더니 피로가 많이 풀렸다. 지인이와 대화하면서 마음도 많이 편안해졌다. 열흘치 식량꾸러미를 보급받아 배낭은 다시 20kg이 넘는 무게가 되었지만, 하루의 휴식일을 보내고나니 컨디션은 다시 최상이 되었다. 어제까지 걸어온 길은 낙동정맥 주능선 길이었다. 부산에서 지금까지 낙동정맥따라 한달동안 실제 산행거리 500km는 걸어온 것이다. 이제 4,5차 구간은 백두대간 본능선길이다. 오늘 그 시발점인, 낙동강과 한강, 그리고 동해바다 오수천으로 흐르는 삼수령(三水嶺)이 매봉산 근처에 있다. 앞으로 최북단 진부령까지 이 백두대간 산길 300km만 더 걸으면 이번 순례는 끝이난다. 피재에 도착하여 보니 삼수령(三水嶺)이라고 적혀있는 기념비가 세워져 있었다. ‘낙동강과 한강, 그리고 동해로 흐르는 오수천의 삼파수의 자리라고 적혀 있었고, 태백시장의 이름과 함께 자랑스럽게 쓰여져 있었다. 하지만 삼수령의 정확한 지점은 매봉산(1303m)에 있는 1145봉이다. 그 비석의 위치는 1145봉에 세웠졌어야 하는 것이었다.

 

덕항산(1,071m)으로 올라가기 전에 1km 정도 내려가면 예수원이라는 곳이 있었다. 나는 그 골짜기로 향해 내려갔다. 그곳에 가면 저녁을 얻어먹을 수 있을 것 같았고 여차하면 편안한 잠자리도 요청해 볼 속내도 있었다. 하지만 예수원 본건물 앞에 이르러보니, 아직 저녁때가 되지 않았는지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이 깊은 산중에 예수원이라는 곳이 있다는 것도 믿겨지지 않았지만, 이 깊은 숲 속에 여러 채의 건물들이 터를 잡고 들어차 있는 것도 신기했다. 누가 이곳에 예수원을 세웠을까. 건물 분위기도 수련원이나 기도처 같은 느낌이었다. 나는 건물 앞 돌담벼락에 걸터앉아 누군가가 나오길 기다리기로 했다. 마침 아주머니 한 분이 본건물 뒤편에서 산길로 걸어오셨다. 자세히보니 외국인 할머니였다. 풍만한 몸집에 미소짓고 있는 얼굴에 덕이 가득차 보였다. 짧은 커트머리를 하고 있는 백발의 노인 할머니가 다가왔다. 좀 당황스러웠던 건, 이 깊은 오지의 숲속에서 외국인 할머니가 나타났다는 것이었다. 오랜 세월 이곳에서 거주하는 것 같았다. 나는 정중히 인사를 드리고, 하룻밤 묵어갈 수 있느냐고 여쭤보았다.

 

! 안되요. 묵어갈 곳이 없답니다. 이곳은 그런 곳이 아닙니다.”

 

나는 단번에 거절당하자 상심했지만, 다시 한번 사정을 구해 보았다.

 

그래도 어렵습니다.”

 

두 번째에도 거절당하자 돌아설 수 밖에 없었다. 또 다른 야영할 장소를 빨리 찾아나서야 했기 때문이다. 거절의 아픔을 안고 인사도 없이 다시 덕항산 방향으로 올라가려고 발걸음을 돌렸다.

 

, 잠시만요. 잠시만요. 잠시만 기다려 보세요. 마침 저녁식사 시간이니 식당으로 가셔서 식사라도 하고 가세요.”

 

나는 저녁식사라도 함께할 수 있음에 감사했다.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할머니는 한국말도 유창하게 하셨지만, 나에게 존댓말을 써가면서 정중하게 안내해 주었다. 외국인 할머니가 이 깊은 산속에 나와 나를 인도해 주는 모습이 낯설었지만 신기한 체험을 하고 있는 듯 했다. 할머니를 따라 들어간 곳은 돌과 나무로 지어진 비좁고 허름한 돌담집이었는데, 아마 식당과 부엌 기능을 함께하는 장소 같았다. 그 곳에 거주하는 여러 식구들이 식사준비를 하는 동안 나는 식탁 의자에 앉아 기다리며 실내를 두리번거리며 기웃거렸는데, 창가쪽 서재에 가판대처럼 진열된 책들이 눈에 들어왔다. 창가쪽 서재로 가서 진열된 책들을 대충 넘겨보니 대부분의 책자가 대천덕 신부님에 관한 책들이었다. 대천덕 신부님이라는 분이 여러 권의 책을 출간하셨는데 가판대에 판매금액까지 적혀 있었다. 나는 책들을 대충 훑어보면서 대천덕 신부님이 대체 누굴까 궁금해졌다. 책 앞면 속지에 적혀있는 저자의 약력을 보니 대천덕 신부님은 이곳 예수원을 설립하고 개척한 분이셨고, 좀 더 자세히 읽어보니 내가 만났던 할머니는 대천덕 신부님의 사모님이었다. 이 곳 예수원은 1965년에 설립하여 노동과 기도의 삶을 영위하며 자급자족 신앙공동체를 꿈꾸는 곳이었다. 나는 신부님 가족과 자원봉사자들, 신자들을 비롯한 여러 형제자매들이 함께 생활하는 공간에 들어오게 된 것이었다. 여러 책자들을 유심히 살펴보며 이곳이 어떤 곳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철저한 그리스도의 신앙심으로 뭉쳐서 살고 있는 영성공동체 집단이었다. 마침 저녁식사 시간이 되자, 책자에서 본 대천덕 신부님이 들어오셨다. 신부님은 이미 사모님으로부터 나의 이야기를 들었는지 오시자마자 반갑게 먼저 인사를 해주셨다.

 

반가워, 젊은 친구! 지금 백두대간 순례를 하고 있다고? 그래, 아주 멋져!”

 

신부님은 외국인이지만 한국어 구사능력이 뛰어났다.

 

, 안녕하세요. 이 책을 통해서 신부님 이야기를 알게 되었습니다. 지으신 책이 굉장히 많네요.”

 

대천덕 신부님은 외국사람인데도 한국말을 아주 잘했고, 소위 말하는 미남형이었다. 훤칠한 키에 동그랗고 자신감에 찬 노란 눈동자는 강렬했으며, 얼굴에 패인 주름살이 옅게 굳어있었다. 머리숱이 적어 황금색 머릿결에 이마가 훤히 드러나 있었지만 76세라고는 믿겨지지 않을 만큼 아주 건강하고 젊어 보였다. 미국인이지만 선교사업을 위해 이곳 한국에서 40년간 살아오신 분이었다. 식사가 시작되기 전에 신부님의 기도가 이어졌고 신부님의 기도가 끝나자 여러 식구들이 밥숟가락을 들기 시작했다. 열명 정도의 식구들이 식사를 하면서도 차분하고 조용한 분위기였다. 가끔 웃음소리도 들리고 낮은 목소리도 들렸지만 왁자지껄 거리는 소란스런 모습과는 격이 좀 달랐다. 신부님은 식사를 마치고 잠시 자리를 옮겨 원두커피를 마시자고 하셔서, 나는 어떨결에 신부님과 마주할 수 있는 환대의 시간이 주어졌다. 사모님의 안내에 따라 자리를 옮겨 차 마시는 장소로 이동했다. 원두커피가 준비되어 나올 즈음 나는 신부님에게 말했다.

 

신부님, 육체가 죽는다는 건 무슨 의미인가요? 천국간다 지옥간다 그러는데 저는 뭐가 뭔지 모르겠더라구요.”

 

나는 삶과 죽음에 대해 항상 궁금했기 때문에 넌지시 질문을 던졌다. 신부님은 말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젊은이는 하나님을 믿는가?”

 

아니요, 저는 아무 것도 안믿어요. 하나님이 뭔지도 잘 모르겠어요.”

 

허허. 그렇군. 그래. 그래도 젊은 친구가 아주 좋은 질문을 해주었네. 고마워. 성경에는 네 몸은 성전이라라고 알려주고 있지. 육신이란, 성전이라네. 성령이 임하는 곳이야. 쉽게 얘기하자면 단지 잠시 머물다가는 아름다운 집과 같은 것이지. 단지 어느 누구도 그 곳에서 영원히 살수는 없네. 을 벗게 되면 우리들은 또 다른 여행을 준비해야 해. 우리는 그저 하나님 발길에 걷어차여 굴러다니는 돌맹이에 지나지 않네. 하나님의 뜻을 담는 몸그릇에 지나지 않다는 말이네. 젊은이도 그 분의 뜻을 담는 그릇이지. 내 뜻대로 사는게 아니라 내 안의 그리스도가 살 수 있도록 하나님의 뜻을 섬기는 자세가 중요해. 자네가 하나님을 믿건 안믿건 하나님의 자녀임은 부인할 순 없지. 그래서 역설적이지만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네. 저마다 제 꼴을 갖춰서 하나님의 뜻을 모시고 살아야 한다는 거야. 그 분의 도구가 되어 잘 쓰여질 수 있도록 매순간 기도하는 마음이 필요하지.”

 

신부님은 또한 성경구절를 인용하며 설명해 주셨는데 무슨 뜻인지 잘 이해하지도 못했고 기억나지도 않았다. 기독교인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용어가 반복해서 들렸기 때문에 알아들을 수도 없었다. 그 말들은 내 가슴속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러나갔다. 그럼에도 신부님은 오직 나 하나를 두고 정성을 다해 성심성의껏 이야기하고 있었다. 설교하듯 가슴에 와닿지 않는 성경 말씀들을 늘어 놓아서 잘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그 사랑어린 마음만은 느낄 수 있었다. 단지, 과연 내 질문에 부합하는 것인지 의아함이 들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하고, 왜 가까운 사람의 죽음으로 슬퍼할 수 밖에 없는 건가요? 죽음의 실체란 것이 있는 건가요?”

 

, 젊은 친구! 진지한 질문이군. 아주 훌륭해. 좋아. 젊은이는 자신은 능력으로 세상을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하지만 내가 볼 때 자네도 하나님의 사랑으로 살려지고 떠받들여지는 존재라네. 단 한 순간도 그 분의 사랑 없이는 살 수 없네.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사랑이시지. 누구든지 그 사랑을 깨닫고자 한다면, 먼저 하나님이 우리와 분리되어 있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야 해.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해야 해. 육체라는 건 헌누더기에 지나지 않아. 이 육체가 인줄 착각하면 죽음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허구의 를 참된 자신이라고 믿고 있다네. 그 신념이 개인과 사회를 불행에 이르게 한다는 것이지. 하나님이 함께하고 있는 그 실체속에 거주하는 것이 아니라 관념화된 현실에 머물러 있지. 그 수많은 사람들이 임종의 자리에 누워 외부의 모든 것이 떨어져 나갈 때에야 비로소 이 세상 어떤 것도 자신의 존재와 무관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네. 죽음이 가까워 오면서 소유라는 개념 자체가 궁극적으로 완전히 무의미한 것임이 드러나는 것이지. 그 죽음의 실체를 이해하고 나면, 삶과 죽음이 결국 하나라는 것을 알게 될거야. 그리고 무엇이 소중한 것인지도 말이야. 세상에는 소유할 수 있는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테니까. 내가 하는 일이 아니라 내 안의 그리스도가 관장하고 있음을 믿어야 해. 믿음이 없으면 재앙같은 삶을 살다가는 것이야.“

 

신부님은 잠시 말씀을 중단하고 커피잔을 입가에 가져가더니 갑자기 몸을 앞으로 굽히시고 가까이 다가와 낮은 목소리로 말씀을 이어갔다.

 

젊은이, 육체와 상관없이 영적인 죽음라는 것도 있다네. 주님의 복음이 우리들 안에서 이루어짐으로써 우리는 하늘나라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거듭나야 해.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성경 말씀이 있는데, 하나님께 최선을 다해 순종함으로써 그리스도인로써 거듭나는 삶을 누릴 수 있다는 얘길세.”

 

신부님의 긴 답변은 성경구절들을 인용하면서 계속 이어졌다. 가끔 말씀중에 나에게 성경구절을 보여주기도 하고 읽어주기도 했다. 다 기억할 수는 없지만, 그 중에 마가복음에 나온 구절은 기억할 수 있었다. 내가 받아들인 결론을 말하자면, 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만이 죽음으로부터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이라는 주장이었다.

 

너희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고 몸이 의복보다 중하니라 (중략) 믿음이 작은 자들아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여 구하지 말며 근심하지도 말라 이 모든 것은 세상 백성들이 구하는 것이라 (중략) 다만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런 것들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누가복음 12:22-31)

 

내 머릿속이 무거워진 것은, 내 수준에서 이해할 수 있는 용량을 넘어서 버렸기 때문이다. 그래도 나는 인내심을 가지고 듣기 위해 노력했다. 이런 환대를 무시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었고, 저녁밥을 구걸한 이상 예의를 갖추어야 했다. 사람이란 자고로 밥값을 해야하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했다. 성경말씀들이 모두 생소했고 마음 깊이 와닿지는 않았지만, 최대한 마음을 열고 귀를 기울였다. 신부님이 하시는 말씀 하나하나에 눈을 맞추며 흐트러짐없이 경청하는 모습을 보여드렸다. 말씀하시는 신부님의 눈빛과 목소리에는 사랑 가득한 마음이 실려 있었기에 그 열정어린 모습에 사로잡혀 빠져들기도 했다. 신부님에겐 사람의 마음을 훔치는 솜씨가 있는 것 같았다. 신부님이 하나님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나를 얼마나 진심으로 마중하고 있는지 느낄 수 있었다. 신부님이 하시는 말씀보다는 그의 눈빛, 표정, 미소, 몸짓, 음성에 매료되어 천천히 감화되어 가고 있었다. 온마음 온정성으로 불쌍한 이 영혼을 궁휼히 여기며 품어주시는 신부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었다. 스쳐지나가는 이 젊은이를 이렇게까지 환대해주는 모습이 나를 감동케 했다. 그저 스쳐가는 이 나그네를, 아무것도 아닌 이 한 사람이 그로부터 얼마나 존중받고 있는지 느껴졌다. 오늘의 이 짧은 순간의 작은 인연조차도 이렇게 깍듯하고 소중하게 마중해 주는 모습에 감화되어 버렸던 것이다. 이 황홀한 체험을 하면서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신부님에 대한 존경심이 올라오고 있었다. 나는 신부님 말씀이 멈출 때까지 체면에 걸린 사람처럼 꼼짝할 수 없었다. 신부님 인체에서 발산하는 영적인 기운과 몸 주위에 형성된 그 아우라(aura)처음 경험해보는 거였다. 그 에너지는 나의 번민과 고통들을 치유해 주고 있었다. 긴 설교가 멈추었을 때, 나는 정신을 차렸다. 밤이 깊어가고 있었기에 나는 다시 출발해야 함을 말씀드렸다. 그리고 신부님과 사모님에게 감사인사를 드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든 환란에는 고귀한 메세지가 담겨져 있다네. 고통에는 늘 고상한 목적이 있지. 고통을 온전히 받아들일 때, 그 고통에 숨겨진 하나님의 선물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네. 잘 가게, 젊은이! 자네의 선한 의지를 믿으시게. 기회는 언제나 열려있어.”

 

신부님은 발길을 떼는 순례자에게 마지막 인사말을 해주었다. 나는 무거운 배낭을 짊어 메고 덕항산으로 다시 올라가기 시작했다. 열심히 내달렸다. 어제 본 보름달이 다시 떠오르리라는 생각으로, 야간산행까지 각오하며 걸었다. 예수원에서는 하룻밤을 묵을 수 없었지만, 오랜 시간 신부님과 이야기하며 많은 위로를 받았다. 동녘바다가 전망되는 1059봉에 도착하여 시계를 보니 저녁 8시였다. 야영장소를 두리번거리다가 정상에 탠트를 치기로 했다. 돌부리가 튀어나온 울퉁불퉁한 산비탈 바닥을 등짝 눕힐 공간만큼은 펑퍼짐하게 다져서 탠트를 쳤다. 숲속에도 나뭇가지 사이로 비치는 달빛이 들어차고 있었다. 한달만에 찾아온 보름달이었다. 어둠이 짙어질수록 더욱 가까이서 붉게 떠오르며 보름달 표면에 드리운 그 얼룩진 형상이 선명히 드러나고 있었다. 정상으로 부는 약한 바람은 땀에 젖은 몸을 식혀주기에 충분했다. 멀리 두타산과 청옥산, 그리고 고적대까지 능선길이 보였다. 나무들 사이에 어렴풋이 굽어보이는 마을에서 불빛들이 하나둘 켜지고 있었다. 라디오를 켜서 듣고있다보니 마치 성경에 나오는 홍해가 갈라지는 것처럼 진도 앞바다가 열린다고 한다. 바다가 갈라진다는 기적같은 자연현상이 현실에서도 이렇게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흥미로운 소식이었다. 문득 대천덕 신부님의 말씀이 비현실적인 이야기가 아닐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초현실적인 상황은 현실에서도 얼마든지 벌어질 수 있는 일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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