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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화다큐에세이

3부 - 4장 (별똥별과 지구의날)

by 당당 2022. 1. 19.

4. 별똥별과 지구의 날

 

산불감시초소는 내게 최고의 숙박장소였다. 지면으로부터 78미터 높은 곳에 있었기에 산짐승이나 뱀같은 파충류, 벌레나 개미로부터도 안심이 되는 곳이었다. 대각선으로 바로 누우면 머리부터 발끝까지 딱 맞는 사이즈다. 특히 사방이 창문으로 되어 있어 바람을 막아주면서도 주변 전경을 모두 둘러볼 수 있는 곳이었다. 잠결에도 그 친구를 만나 행복한 기분에 젖어 그 여운이 오래 지속되었다. 눈을 떠보니 여명의 황홀한 빛깔들이 창문가에 스며들고 있는 5시경이었다.

울치재로 향해 가는 산길위엔 영롱한 아침이슬들이 태양빛에 더욱 발하며 초롱초롱 빛나고 있었다. 밤새도록 새벽의 온기를 끌어모아 태어난 이슬들이 이젠 다시 떠날 채비를 하며 나와 함께 아침을 맞이했다. 하늘로 올라가지 못한 길섶에 맺힌 풀잎 이슬들은 걷는내내 신발속에 스며들어와 하나가 되었다.

정오경에 독경산(讀經山, 514m) 정상으로 가는 길목에서야 비로소 햇빛이 들기 시작했다. 독경산 정상엔 헬기장이 있고 산불감시 초소가 세워져 있었다. 나는 평온한 한낮의 따스함과 시원함을 마음껏 만끽하고 있었다. 일요일이었기에 마침 부산에 있는 동래고등학교 동창회팀 여섯명을 만났다. 그들은 낙동정맥을 토일요일마다 양일간 걷는다고 했다. 돗자리 위에는 맛있는 음식들이 펼쳐져 있었다. 광어 우럭회도 보였다. 주말과 주일엔 언제나 산에서 그들은 만나서 산 중턱에서 거창한 파티를 진행하는 모양이었다. 어디로 가는 길이냐고 묻길래 나는 낙동정맥을 20일째 걷고 있다고 대답했다. 순간 놀라움과 부러움이 서린 눈빛들로 바뀌는 것이 보였다.

 

, 젊은 친구가 대단하네! 이리와 앉아! 여기 여기로! 정말 대단한 젊은이네.”

 

그들은 일종의 경외감과 존경심으로 이구동성 탄복하고 있었다. 이런 반응은 순례기간 내내 겪어왔기 때문에 놀랄만한 경험은 아니었다. 언제부터인가 산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백두대간 단독등반을 한고 말하면 선망의 대상이 되고 도와주어야 할 대상이 된다는 걸 알게 되었다. ‘백두대간 단독등반은 아무나 쉽게 할 수 있는 순례가 아니기 때문에, 산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내가 백두대간 순례중인 걸 알면 대우가 달라진다. 구걸의 효과를 최대한 살려야 할 때에는 부산에서부터 여기까지 어떻게 걸어왔는지, 진심을 다해 구구절절 말해야 할 때도 있었다. 구걸의 정도와 수위에 따라 나의 멘트들은 과장될 때도 있었다. 하지만 내가 너무 애써서 설명하지 않아도, 산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모두가 정이 많고 친절해서 대부분 아낌없이 자신의 것들을 내주는 경우가 많았다. 마침내 동창회 산악모임 자리에 앉아 음식 좀 먹고 가란다. 더 없이 훌륭한 파티에 초대된 나는 쾌재를 불렀다. 오늘도 내 식량을 아끼고 얻어먹을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그들은 하산만 남겨두고 넓은 바위 둔덕에 둘러앉아 점심 겸 약주를 하고 있었다. 소주 한 팩을 비우면 다시 배낭 속에서 또 다른 종이팩 소주 하나가 나왔다. 그 때마다 닭강정, 오징어무침, 홍어조림, 갈비찜 같은 먹을거리들이 개봉되는 것이었다. 산에서 먹는 술안주로는 특별한 음식들이었다. 돈 좀 벌고 있는 분들 같았다. 동래고 동창회 아저씨들은 음식상에 나를 끼워만 놓고, 그들만의 대화에 빠져 시시덕거렸다. 눈치를 보아하니 불쌍해 보여서 음식상에 초대해 주었을 뿐, 나에 대한 관심은 별로 없어 보였다. 나는 어차피 얼굴에 철판을 깔고 다니고 있었던지라, 부끄러운 생각은 추호도 없었고 먹는데에만 정신이 팔려 있었다. 또 다시 찾아온 기회를 놓치지 않고 열심히 뱃속에 넣는 것이 목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들도 친구들간의 이야기에 빠져 내 신경을 쓸 상황도 아닌 것 같았다. 듣고 싶어 들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들의 오가는 대화속에는 재미난 이야기들이 참 많았다. 집안이야기부터 정치 사회 경제 분야까지 총 망라되어 널뛰고 있었다. 일행중 한 사람은 아내 몰래 바람피우는 이야기를 키득거리며 마치 자랑하듯 서슴없이 얘기하는데도 일행들은 에피소드 정도로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분위기였고, 저마다 숨겨논 애인들이 있는 것 같았다. 별의별 얘기를 다 꺼내서 하는 걸 보니 서로의 관계가 막역한 동기동창이라는 것이 느껴졌다.

그들은 얼큰히 취한 상태로 산에서 내려갔다. 나도 취기가 올라왔지만 운행계획표대로 이곳에서 하룻밤 더 묵어갈 계획이라서 맘은 편했다. 독경산 정상에도 산불감시초소가 있었다. 산불감시초소는 대부분 산 정상 한 가운데에 설치하는데, 360도 전체 조망이 잘 되는 곳에 설치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대부분 높이 510m 높이의 철탑을 세우고 그 위에 초소를 만든다. 쇠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서 감시초소의 바닥문을 열면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구조이고, 안으로 들어가면 다시 바닥문을 닫아야 했다. 배낭을 메고 올라가서 문을 닫고 짐을 풀었다. 두평 공간에서 사방이 확연히 조망된다. 알리미늄 샷시로 된 창문도 여닫을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어제보다 더 깔끔하고 튼튼한, 내게는 호텔급 방보다도 더 안락한 숙소였다. 독경산 주변 산줄기들이 파노라마로 한눈에 들어왔다.

6시반이 넘어서자 한 조각의 구름이 저물어가는 해를 가리기 시작했다. 이곳엔 바람의 흐느낌뿐이었다. 뜨고 지는 해와 달, 그리고 별들만 가득 들어찬 곳. 하룻밤을 이 천상의 누각에서 맞이하게 된 것이 더없이 기뻤다. 갑자기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아늑하고 깨끗한 초소에서 펼쳐지는 파노라마가 눈물나도록 감격스러웠다. 이토록 아름다운 곳에서 홀로 지켜가는 이 산정의 적막감을 지우기 위해 라디오를 켰다. 마침 조지윈스턴의 연주곡 12(December)이 흘러나왔다. 우연의 일치처럼 지금 내 기분과 이 분위기에 딱 들어맞았다. 조지윈스턴의 아름다운 피아노 선율에 완벽히 녹아들며 몸과 마음이 완전 이완되기 시작했다.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자의 심정이 이런 느낌이었을까. 갑자기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생각이 밀려왔다. 문득 자살바위 이야기가 생각났다. 미치도록 아름다운 풍경 앞에서 시간이 멈추기를 소망하며 절벽으로 몸을 던진다는 곳, 이 생애에 더 바랄 것도 없고 여한이 없음을 느꼈을 때 계획되지 않은 자살이 일어난다는 곳, 지구상에 그런 자살바위가 십여 곳이 있다고 전해진다. 나는 자살바위 이야기를 신문에서 읽은 적이 있었다. 나는 마치 자살바위에 앉아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죽음을 앞둔 최후의 감회는 이렇게 비장할 것 같았다. 아름다운, 너무나도 아름다운 그 순간에 자살을 택한다는 자살바위가 지금 이 곳 같았다. 창밖으로 살며시 포개어지는 구름들 사이사이로 붉은 광명의 빛줄기들이 난사하고 있었고, 어둠에 쫒겨가던 일몰이 마지막 황금성을 태우며 최후의 유혹을 하고 있었다.

 

삶과 죽음은 거짓이라네. 일말의 착각이라네. 자네도 빛이며 모두가 빛이라네. 육체에 집착하지 말게나. 육체는 영원한 생명으로 가는 길목에서 걸림돌이 될 수 있으니 조심하게나. 무엇을 두려워 하는가. 그냥 죽어버려! 죽어야 사는 것이네. 그것이 거듭나는 길일세. 죽지 않고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생명의 원리는 그런 것이 아니라네. 빛과 빛은 분리될 수 없는 것이지 않는가. 결코 죽는 것이 아니라네. 자네의 부활을 보장하겠네. 어서 오시게나. 뛰어 내리시게. 기다리고 있지 않은가.’

 

죽음의 사신이 나를 유혹하며 죽음의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속죄하듯 참회의 울음이 터져 나온 건 그 때였다. 나는 소리내어 엉엉 울기 시작했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낮에 동래고 아저씨들과 과하게 먹었던 술기운 탓만은 아니었다. 아무도 없는 깊은 산중, 어린 아이마냥 울어댔다. 고통으로 시름겨워 흘리는 눈물도 아니었다. 마음이 괴롭거나 슬퍼서도 아니었다. 왜 울고 있는지는 몰랐지만, 바보처럼 멍하니 앉아 산불감시초소 바닥을 치며 울었다. 나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돌아가는 걸까. 울음을 참으려고 올려다 본 하늘 위에서 별똥별의 긴 꼬리가 반짝하고 획을 그었다. 밤하늘에 간혹 나타났다 사라는 별똥별, 그 별은 캄캄한 밤에 한 훽을 휙긋고 사라진다. 궤도를 이탈하고 영원히 사라져 버린 별들의 이야기. 생애에 단 한 번의 기회, 단 한 번의 시도로 궤도를 이탈한 별은 한 순간의 그 찰라에 잠깐 반짝이고 허무하게 사라져 버렸다. 두 번 다시 되돌릴 수 없는 운명의 저 별똥별. 우리도 저 별똥별처럼 잠시 나타났다 사라지는 존재이지 않을까? 저 화려하고 찬란한 별똥별의 소멸이 아름답게 보이는 건 왜일까. 문득 괘도를 이탈한 별이, 우주의 한 귀퉁이에 생채기를 내며 작열히 전사하는 이야기가 너무 드라마틱하고 위대해 보였다. 별똥별처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궤도를 이탈할 수 있는 용기, 그 용기가 내게 필요했다. 별똥별의 운명이 애달파서 잠 못드는 것도 아니었다. 밤은 더 이상 내게와서 번민이 되어주지 못하고 그리움의 상처로도 남겨지지 않았다. 홀로 지켜가는 외로움, 이 지독한 고독,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사랑받지 못하고 있다는 두려움, 이 모든 혼란스러움을 날려버릴 용기가 필요했다. 어디서부터 시작된 열등감일까, 나는 언제나 존중받고 싶었고 대우받고 싶었다. 밤의 변덕은 가끔 거칠고 숨막히게 나를 몰아세우기도 하지만 무형의 밀어로 내게 다가와 연인의 숨결처럼 부드러운 교감을 나누기도 한다. 이 밤은 언제나 고통과 절망의 늪에 허우적거리는 내 지친 몸과 마음을 어루만지며 위로와 안식을 주었다. 그리고 저 밤하늘을 가로지르며 지나가는 초승달의 자전. 어디로 갔다가 어디서 돌아온 것일까! 변화무쌍하고 예측불가능한 밤의 무대는 새벽까지 위대한 탄생을 준비한다. 또 다시 밤의 포효가 시작되었다. 계곡을 쓸어 올리는 바람, 산정에 올라 허공중에 흩어지는 미친 바람소리. 동해에서부터 날뛰며 달려오는 저 샛바람, 나는 밤의 친구이자 바람의 친구가 되어야 한다. 오늘도 별과 바람과 초승달이 밤하늘을 수놓고 있다.

 

밤하늘에 지는 별똥별들을 새어가며 새벽 1시경까지 잠들지 못했다. 독경산 정상 산불감시초소 안에 누워 창밖으로 바라보이는 별들과 교감을 나누고 있는 동안 창틈과 바닥 사이로 찬바람이 스며들어와 추위에 떨어야 했다. 한참을 뒤척이다가 겨우 잠이 들었던 것이다. 결국 새벽녘에 잠에서 깨어나 가스버너를 피우고 덜덜 떨면서 날이 밝아오기를 기다려야 했다. 그런 와중에도 날마다 동터오는 아침을 맞이하는 건 신비로운 체험이 아닐 수 없다. 오늘도 어김없이 다섯시반부터 어둠속에서 빛이 출현하기 시작했다. 여명빛에 일어서는 주변 풍경들이 파노라마(panorama)로 펼쳐지고 있었다. 이곳 독경산 산불정상초소는 일출과 일몰을 언제나 전망할 수 있는 곳이다. 날이 밝아오면서 자세히 둘러보니 동해에 운평선이 드리워져 있었다. 그 운평선에서부터 태양이 서서히 올라왔다. 운평선에서 밝아오는 태양빛은 신령스런 기운이 감돌았다. 하루를 잉태하는 통고의 시간, 온 세상의 속살들이 드러나고 있었다. 창조의 비밀문이 열리는 이 순간만큼은 추위도 아무런 위협이 되지 못했다. 수평선 위로 강렬하게 드리워지는 황금빛깔 무늬들이 삼라만상에 아침을 흩뿌리고 있었다. 오늘도 부지런히 움직였다. 독경산을 기준으로 어제까지 2차구간은 끝났고 오늘부터 3차구간의 시작이다. 편의상 총 5차구간으로 운행일정표를 세웠으니, 순례계획중 5분의240%는 진행한 것이다.

 

오늘은 제26회 지구의 날이란다. 라디오에서는 지구의 날과 관련한 아프리카 르완다 이야기를 쏟아내고 있었다. 그러니까 2년전 르완다에서 벌어진 역사적 사건이었다. 르완다에는 인구의 85%를 차지하는 후투족과 14%인 투치족 살고 있다고 한다. 1916년부터 벨기에가 르완다를 식민통치하던 시절, 두 종족 간의 갈등은 소수민족인 투치족을 우대하고 다수민족인 후투족을 홀대하는 종족차별정책에서 비롯됐다. 1962년 르완다가 독립한 후에도 두 종족간의 갈등은 계속됐다고 한다. 후투족은 오랜 세월 투치족의 핍박을 견뎌야 했단다. 그 인고의 세월을 이겨내고 결국 후투족 출신 대통령을 선출하게 되었는데, 투치족이 19944월에 후투족 대통령 전용기를 격추했단다. 후투족 출신 대통령은 그 사고로 숨지는 사건이 발생했던 것이다. 분노한 르완다 85%의 인구인 후투족은 100여 일 동안 투치족 100만 명 이상을 잔인한 방법으로 학살했다. 투치족이라면 어린이 노인 여성 할 것 없이 보이는대로 죽였으니, 르완다 전체 인구의 10%가 참혹하게 목숨을 잃게 되었다. 그래서 422일 지구의 날에는 르완다에서 벌어진 참혹한 사건을 기념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1995422일에도 르완다 정부군의 발포로 8천 여구의 시체가 지구의 한 어귀에 잠적했다는 뉴스가 흘러나왔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그 이야기를 돌이켜 생각해보니 소름끼치는 이야기였다. 산길을 걸으면서도 르완다의 아픔이 생각났다. 한명도 아니고 백만명이라니! 이 끔찍한 만행이 지구상에서 벌어진다는 것이 믿겨지지 않았다. 정말 죽음이란 무엇일까. 그들은 어디로 간 것일까. 아무런 이유도 없이 죽어간 사람들의 원혼은 누가 달래줄 수 있을까. 죽은 그들도 누군가에게는 아버지고 어머니며 아들딸이었을 텐데.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아픔이야말로 생애 최고의 고통일 것이다. 하물며 100만명에 대한 집단학살극이 지구상에서 벌어졌다니! 아프리카 르완다에서 벌어진 투치족 민족의 고통을 누가 가름할 수 있을까. 지구별에 뿌려진 저 핏물들은 어디로 갔을까. 이름없이 사라져간 다량의 죽음은 죽음이 아닌 것인가. 시체구덩이에 흙을 덮으면 낡은 세계가 새로워질까. 숨겨진 채 표류하는 지하 강바닥에 지구의 그림자가 흔들리고 있다. 역사의 뒤안으로 아무말 없이 사라져간 그들의 죽음이란 무엇일까. 르완다를 위한 국제심포지엄이 열린다는 422일 지구의 날, 오늘, 무엇을 증명할 수 있을까. 라디오에서 흘러나온 르완다 이야기는 지구인으로 살아가는 한 사람으로써 가슴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멀리 영덕 해안으로 바다가 희미하게 보인다. 동해바다 고기잡이 배가 하나둘 불을 밝히고 있다. 대부분 오징어잡이 배다. 요즘에 오징어가 가장 많이 잡히는 철이란다. 영덕 시내 야경 뒤편으로 떠다니는 하얀 불빛들이 수평선 위에 떠서 장관을 이루고 있다. 어느 누구도 내가 이 높은 산정에 올라서서 영덕시내의 야경을 보고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 할 것이다. 이 먼 곳까지 동해바다 파도소리가 들리다니, 자연의 소리에 민감하게 귀기울이는 일상이다보니 청력이 좋아진 것일까. 일정한 리듬을 타고 미세하게 들려오는 파도소리에 마음을 빼앗겨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