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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화다큐에세이

2부 - 1장 (환상방황)

by 당당 2021. 11. 15.

[ 2: 나를 찾아가는 순례]

 

1. 환상방황

 

그는 왜 죽었을까. 그리움으로 사무치는 세월을 견뎌야 하는 산자의 형벌. 삶과 죽음, 환영이가 남겨두고 간 유일한 화두는 바로 이것이다. 나는 그 삶과 죽음의 비밀을 알아야겠기에 이 무모한 순례를 시작하게 되었다. 인생이란 살만한 가치가 있는 것일까? 인간다운 삶이란 무엇일까? 이러한 삶이 아닌 또 다른 삶은 가능할까? 나는 왜 태어났으며 라는 존재는 무엇인가? 나는 궁금했다. 끊임없이 내 안의 나에게 묻는다. 불평등하고 부조리해 보이는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 신이란 존재하는 것일까? 당장 내일 죽어도 여한이 없는 경지의 삶이란 무엇일까? 풀리지 않는 삶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들, 나는 이 고민에 대한 해답을 찾지 못한다면 집으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다짐을 했다. 부산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끊임없이 내 자신에게 묻고 있었다.

부산에 도착해서 백양산(642m) 정상 근처에서 탠트를 치고, 저물어가는 낙동강변의 풍경을 보다가 잠이 들었는데, 331일 아침 첫날부터 백양산 정상으로 올라오는 사람을 만났다. 순례를 시작하며 만나는 첫 번째 사람이었다. 이제 막 금정산(801m)으로 출발하려던 참이었는데 무심결에 먼저 인사를 했다.

 

수고하십니다

 

수고하십니다, 서로 모르는 사람들이 산에서 만나면 나누는 인사말이다. 아무 생각없이 무심결에 습관적으로 반응하는 말이었는데, 그는 나의 인사에 화답 차원에서 맞장구도 쳐주지 않고 무뚝뚝하게 가까이 다가왔다. 그 눈빛은 예사롭지 않아 섬뜩한 기분마져 들었다. 환자처럼 뼈만 앙상한 체구에 웃는 기색도 없이, 빼빼마른 길쭉한 얼굴은 창백해 보였다. 그래도 황토색 개량한복을 입고 위엄있는 자태로 다가오는 발걸음은 날아갈 듯 사뿐하고 가벼워 보였다. 그가 다가올수록 어떤 광채가 그 사람 주변을 감싸는 착각을 일으켰고, 땀 한방울 흘리지 않고 도도하게 걸어오는 모습에서 어떤 확신에 찬 기풍이 느껴졌다. 까까머리였지만 흰수염이 구랫나루까지 덮고 있었기에 대략 50살 내외로 보였다. 아무런 짐도 없는 것을 보니 이 근처에 머물면서 산책을 나온 사람 같기도 했고, 근처 어디 암자에서 도닦는 사람 같아도 보였다. 얇은 황토색 개량한복을 입은 이 도인은 점점 가까이 다가오더니 대뜸,

 

뭐 하러 왔는가?”

 

그는 처음부터 반말을 하면서 나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아무리 내 나이가 어리지만 기분이 좀 언짢아졌다.

 

여행 왔어요

 

나는 퉁명스럽게 답변하면 그냥 지나갈 것이라 생각했다. 얼떨결에 대충 무성의하게 대답한 것이 기분 나빴던 것일까. 이 꼰대같은 도인이 갑자기 내 앞에 멈춰서서 나를 뚫어지게 쳐다본다. 그의 무표정한 얼굴을 가까이서 쳐다보니 주름살도 없이 아주 맑은 얼굴이었다. 그는 한동안 내 관상을 뚫어지게 쳐다보더니,

 

너무 먼데에서 찾지 말게나. 돌고 돌아 제자리일 뿐이라네.”

 

마치 사주풀이 하듯이, 퉁명스럽게 내던지는 말이었다.

 

? 그게 무슨 말씀이예요?”

 

산쟁이구먼?”

 

그는 내 질문에는 관심이 없다는 듯이 대답하기는 커녕, 내 얼굴만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아마 내가 메고 온 배낭의 종류와 크기, 나의 복장 등을 훑어보고 내가 전문산악인임을 알아차린 것 같았다. 산악인들은 복장만 봐도 쉽게 구분할 수 있기 때문에 누구라도 짐작할 수 있었을 것이다. 나는 그와 말을 섞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하고 얼버무리며 귀찮은 듯 짧게 대답했다.

 

자네 안에 깃든 빛을 비추시게나. 자네 안에 내재한 그 빛을 밝혀 나가야해. 그렇지 않는다면 여행이라는 게 돌고 돌아 다시 제자리야. 공염불이지.”

 

그는 아주 냉소적으로, 그럼에도 명확하고 단호하게 나에게 말했다. 그 말을 남긴 후에 그는 스쳐지나듯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라져 갔다. 나는 순례 첫날부터 재수없고 불쾌한 일이 벌어졌다고 생각했다. 처음에는 갑자기 한 대 얻어맞은 느낌이어서 무례하다는 생각에 기분이 언잖았지만, 한편으로 그의 말들이 자꾸 되뇌어졌다. 황토빛 개량한복 옷깃을 날리며 유유히 사라지는 그 모습과 단호하고 냉소적인 어조가 뇌리에 박혔다. 강렬했다. 처음 만나는 사람에 대한 그의 불손한 태도에 맘이 불편했지만, 그의 말 한마디가 머릿속에서 메아리처럼 울려 퍼지고 있었다. 내 안의 빛을 밝히지 않는다면 여행이란 것이 무의미할 것이라는 메시지로 들려왔다. 헛된 방황을 경계하라는 뜻 같았다.

돌고 돌아 제 자리?’, 나는 왜 이런 생각이 그 때 떠올랐는지 모르겠지만, 엉뚱하게도 환상방황(環狀彷徨)이란 단어가 생각났다. 환상방황이라는 말은 주로 전문산악인들 사이에서 회자되는 용어다. 방향 감각을 잃고 같은 지점을 맴도는 현상을 말한다. 산악인들 사이에서는 링반데룽(ring wanderung)이라고도 한다. 방향감각을 잃은 상태에서 자신이 설정한 목표로 간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한 점을 중심으로 빙빙 도는 현상이다. 환상방황에 걸리면 하이포서이아(hypothermia) , 저체온증에 걸려 목숨을 잃곤 한다. 그런 사고들은 대부분 히말라야 고산지대의 눈덮힌 만년설 봉우리를 등정하는 산악인들에게도 발생하지만, 국내에서도 깊은 산중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가 발생하기도 하며, 한여름 비가 오는 날에도 종종 발생하기도 한다. 그가 떠나고 나서도 내 안의 빛을 밝히지 않는다면 돌고 돌아 다시 제 자리라는 그 충고가 귓가를 맴돌고 있었다.

 

아침부터 출발해서 만덕고개를 넘어 금정산 정상 고당봉(801m)에 도착했다. 8시간 동안 지도상의 거리 14km를 하루종일 걸었다. 배낭엔 보름치 식량이 모두 담겨있어 25kg에 육박하는 무게를 고스란히 메고 걸어왔다. 날은 이미 어두워져서 흐린 하늘빛에 반사되는 바위들만이 분간될 수 있을 정도였다. 김해평야와 부산시의 주변 야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펑퍼짐한 야영장소를 찾아냈다. 양산천과 낙동강이 합류하여 바다로 뻗어나가는 장관을 연출하는 곳이다. 시야가 확 트인 곳에 탠트를 치고 하룻밤 묵기로 했다. 탠트는 몽벨 문라이트 1인용 삼각형 탠트를 준비해 왔다. 일본에서 만든 좀 비싼 제품이었는데, 설치가 편리하고 가벼워서 작심하고 구비했다. 들어가 앉으면 머리가 천정에 살짝 닿았고, 발 뻗는 부근은 30cm 정도의 높이여서 한 사람이 누우면 겨우 발을 집어넣고 잘 수 있을 정도였다. 운행중에 힘을 아낄 수 있도록 무게와 부피를 줄이기 위한 나름의 방법이었다. 가지고 올라온 물이 모자라서 쌀은 씻지도 않고 코펠에 담아 밥을 했고, 참치통조림과 햄, 인스턴트 황태국을 끓여서 먹었다. 며칠간은 무거운 식량부터 집중적으로 먹어치워야 했다.

어둠이 찾아와 탠트 안에서 홀로 앉아 촛불을 켰다. 고당봉 밑에 고모당이라는 굿터에서 징을 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지근거리에서 무당들이 굿을 시작한 모양이었다. 한동안 귀에 거슬려서 밤새 몸을 뒤척이긴 했지만, 순례 첫날을 축하해주는 자장가로 삼아야겠다고 마음먹으니 요동치던 뛰틀린 심사가 편해지기 시작했다. 피할 수 없는 불가피한 상황을 받아들이고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마음 먹었다. 카르페디엠(Carpe diem), 현재에 충실하자. 피할 수 없으면 즐기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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