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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화다큐에세이

1부 - 4장 (옴 OM)

by 당당 2021. 11. 12.

4. (OM)

 

그렇게 보름이 흐르고 부산으로 출발하기 이틀을 남기고 있을 즈음, 무관심하고 냉담한 반응을 보였던 자영씨에게서 만나자는 전화가 왔다. 의외였다. 어떤 심경의 변화가 있었을까. 나는 약속한 장소인 종로 골목길 허름한 커피숖에서 자영씨를 만나러 갔다. 그녀도 고민고민 하다가 나를 만나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단다. 거의 반년만에 본 그녀의 모습은 환영이와 함께 있었을 때의 모습처럼 정상으로 돌아와 있었다. 허브향이 은은히 풍겨져 나오는 그녀는 여전히 아름다웠고, 요조숙녀처럼 차분하며 정서적인 안정감이 느껴졌다. 처음에는 서로 무슨말을 해야할지 난감했지만, 이내 날 만나고자 했던 이유를 알게 되었다.

 

사실은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왔어요. 전달할 것도 좀 있고요. 우선 이거 받으세요. ‘이라고 하는 돌맹이예요. 환영씨 유품인데 성정씨에게 꼭 필요할 것 같아요

 

나는 무심결에 건네주는 물건을 받았다. 계란만한 넙죽한 돌맹이였는데, 표면의 빛깔 무늬가 화려했다. 알파벳으로 ‘OM’ 이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고, 그 주위로 돌무늬가 회오리치듯 여러 색깔을 품고 있었다. 돌맹이에 둘러쳐진 갖가지 줄무늬와 움푹 페어있는 홈, 비누처럼 미끌미끌한 촉감, 그리고 방향과 각도에 따라 빛깔 무늬의 색이 달라져 보였다. 각도를 약간 비틀면 희한하고 신기하게도 색깔이 달라지는 돌맹이였다. 나는 이 돌맹이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이 돌맹이는 인도의 수도 델리(Delhi), 빠하르간지 거리 골동품상에서 환영이가 구입했던 것이다. 가르왈 히말라야로 출발하기 전에 빠하르간지에서 쇼핑한 적이 있었다. 그가 골동품 상점에서 이 돌맹이를 구입할 때, 나는 그의 옆에 있었다. 환영이는 그 돌을 만지면서 나에게 (OM)진언(眞言) 가운데 가장 위대한 것으로 여겨지는 신성한 음절이야라고 스쳐가듯 말했다. 환영이가 그 때 나에게 행운을 가져다주는 영험한 돌맹이라고 말하기도 했었다. 나는 믿지 않았지만, (OM)이라는 뜻은, 태초의 소리, 우주의 모든 진동을 응축한 기본음이란 설명도 덧붙여 주었다. 환영이는 불교신자였고 나는 무신론자였기에 대수롭지 않게 홀려버렸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골동품 가게 주인장은 유창한 영어를 구사하며 그 돌맹이를 환영이에게 강매하려 했었다. 그 때, 환영이의 눈빛은 마치 보물을 찾은 듯 밝게 빛나 보였지만, 나는 그 주인장이 얼토당토않게 너무 높은 가격을 부르고 있었기 때문에 바가지를 씌우려 한다고 생각했다. 살짝 짜증이 올라왔고, 눈빛으로 환영이에게 고개를 절레절래 흔들며 사지 말라는 신호를 보냈다. 나는 불쾌한 마음으로 등을 돌려 먼저 가게를 나왔는데, 환영이가 그 돌맹이를 샀다는 사실은 이번에 알게 되었다.

 

왜 이걸 저에게 주려는 거죠? 저는 이런 거 없어도 괜찮습니다

 

아니예요. 이건 환영씨의 유품이예요. 성정씨가 가져가야 해요. 환영이가 원하고 있어요. 한동안 고민이 많았는데, 돌은 그냥 돌이 아니거든요. 영험이 깃든 돌맹이죠. 뭔가 달라요. 저도 그런 체험을 했거든요. 밤에는 더욱 빛을 발하기도 하죠. 이 특별한 돌맹이인 것만은 틀림없어요. 가끔 환영씨가 보고싶을 때 만지고 있으면 그의 마음이 느껴지기도 하더라구요. 그냥 단순한 돌맹이가 아님은 분명해요. 이번에 긴 여행을 가신다고해서 이 돌맹이를 드리는 겁니다. 환영이가 이번 여행에 함께할 꺼예요. 제가 지난번에 전화상으로 무심하게 대했던 건 사과드릴께요. 사정이 있었어요.”

 

지난번 일은 이미 잊었어요. 그런데 이게 영험이 깃든 돌맹이라구요? 무슨 신화 속 이야기를 하시는 것도 아니고, 좀 상식적이고 정상적인 대화가 필요할 것 같은데요?”

 

(om)’돌이 어떤 돌맹이인지 저도 처음엔 몰랐어요. 그런데 언제부턴가 이 돌을 만지면서 마음속으로 무심히 ‘OM'을 외다보면 환영씨 마음이 느껴질 때가 있어요. 며칠 전에도 만지작거리면서 느꼈어요. 자꾸 성정씨가 생각나는 거예요. 그래서 환영씨가 이 을 성정씨에게 주라는 증표라고 생각하게 되었죠. 분명히 환영씨의 메시지라는 생각이 들어요. 명심하세요. 은 그냥 돌맹이가 아니예요. 이 돌을 통해 환영씨를 볼 수 있을꺼예요. 환영씨의 분신입니다. 이 돌의 가치와 의미를 모르는 사람들은 평생 알 수 없을 거예요. 관심도 없을테니까요. 여기 이 돌맹이에 쓰인 (om)’을 항상 마음속으로 외우신다면 환영씨를 더 가까이서 만나볼 수 있을 거예요. 환영씨도 성정씨의 순례길에 함께 하게 될 거예요. 그렇게 해주세요.”

 

자영씨의 주장은 소설에나 나올법한 이야기였다. 어떻게 이 작은 돌맹이 하나를 가지고 환영이의 분신이라고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미쳐도 단단히 미쳤구나’, ‘먼저 떠나보낸 사람에 대한 그리움이 사무치면 저렇게도 되는구나나는 속으로 되뇌이며 순간 자영씨가 좀 이상해졌다는 생각을 했다. 환영이에 대한 상심이 컸던 탓일까. 지금이 조선시대도 아니고, 21세기에 이런 가당찮은 말을 믿으라는 것인가. 나는 믿겨지지 않았다. 어떻게 돌맹이에게 행운을 바랄 수 있다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탐탁치는 않았지만 환영이의 유품이라고 하니 받아는 두기로 했다. 그리고 직접 만져가며 자세히 살펴보니 여러 가지 색깔의 줄무늬를 띈 돌맹이가 여사롭지는 않아 보였다.

 

이 돌맹이가 분명 행운을 가져다 줄 겁니다. 이번 백두대간 순례를 잘 마치는 날, 제가 마지막 도착지인 강원도 진부령으로 갈께요. 끝까지 멈추지 말고 가주시길 바래요. 환영씨도 기뻐할꺼예요. 절대 포기하지 마세요. 부산에서 출발해서 49일간의 모든 일정을 마치는 날, 제가 진부령으로 찾아 갈께요. 그 날 제가 또 다른 물건을 전달해 드릴 것도 있어요.”

 

의외였다. 518일 진부령에 도착하는 순례 마지막날, 그녀가 진부령휴게소로 지원을 나오겠다는 말이었다. 지난번 전화했을 때에는 내 순례계획에 냉담한 반응을 보이더니, 생각이 바뀐 모양이었다. 순례가 끝나는 날 진부령휴게소에서 만나 무엇을 주겠다는 것인지도 궁금했다. 그녀는 이 여행이 계시를 찾아가는 여행이길 바라는 것 같았다.

 

저에게 뭘 주시겠다는 거죠?”

 

지금은 말씀드릴 수는 없어요. 이번 49제 계획에만 집중하세요. 이 순례가 끝나는 마지막 날 그 이유를 알게 될 거예요. 꼭 백두대간 순례를 완주해서 성공하시길 바래요. 그 때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이곳에서도 함께 기도하고 있을께요.”

 

그런데 왜 꼭 저에게 주려는거죠? 혹시 환영이 유품이라면 예천에 있는 환영이 고향으로 보내시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아니예요. 꼭 직접 받으셔야 합니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어요. 그 이유는 나중에 아시게 될 거예요. 부탁입니다. 부산에서 강원도 진부령까지 완주해 주세요. 마지막날 진부령으로 찾아가서 전달해 드릴께요. 49일간 산길을 걸으면서 날마다 환영이를 위해 기도해 주신다는 이 계획이 성곡하길 바래요.”

 

어떤 물품인지 궁금하긴 했지만 더 이상 묻지는 않았다. 그녀는 이번 순례의 마지막 날에 왜 나를 만나러 온다는 것일까? 왜 순례 마지막 날인 강원도 최북단 진부령에서 환영이 물품을 전달해 주겠다는 것일까? 나는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럴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신비한 비밀을 품은 채 출발하는 여행이기를 바라고 있는 듯 했다. 기어코 이 여자는 내가 이번 계획을 포기하지 못하도록, 끝마칠 때까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나를 조종하며 이끌어 나갈 참인 모양이었다. 그녀는 길 위에서 비밀의 문을 하나씩 열어야 할 때마다 지혜의 열쇠를 던져주는 역할을 자처하겠다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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