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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화다큐에세이

1부 - 3장 (49일간의 영결식)

by 당당 2021. 11. 9.

3. 49일간의 영결식

 

자영씨와 공항에서 헤어진 이후에 나는 그녀를 단 한번도 만나지 않았다. 나는 아무런 계획도 없이 방에서 은둔생활을 하며, 스스로를 자책하고 원망하면서 죄책감에 시달려야만 했다. 그 사이에 혹한의 겨울을 지나 봄이 왔다. 거의 반년이라는 시간이 흘러가고 있었다. 봄이 오던 어느 날, 동네 얕으막한 뒷산을 오르다가 들린 산사(山寺)의 주지스님께서 차담중에 구천(九天)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은 구천에서 떠돈다는 이야기였다. 환영이가 생각나서 귀가 솔깃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하늘과 땅 중간 어딘가에 떠돌고 있을 환영이의 넋이 떠올랐다. 그 날부터 나는 그의 넋을 보살펴야 한다는 의무감에 사로잡히기 시작했다. 환영이를 구천에서 해방시켜 줄 사십구제를 나만의 특별한 방식으로 다시 치뤄주고 싶어졌다.

3월중순경, 환영이 고향인 예천에서 사십구재를 치뤘던 자영씨가 생각나서, 거의 반년만에 망설이다가 전화했더니, 막상 전화를 받아든 자영씨는 멈칫거리며 좀 당황해 하는 목소리였다. 목소리가 중간중간 끊기면서 가냘프게 떨려서 전해져 왔다. 나는 내 계획을 전화상으로 설명해 나갔다. 환영이의 또 다른 방식의 사십구재라는 점을 강조했다. 이번 장기 종주산행에 대한 취지와 목적을 좀 더 자세히 얘기했다. 자영씨는 아무런 질문이나 추임새도 없이 계속 듣고만 있었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아서 내 얘기를 잘 듣고 있는지 의심스럽고 미심쩍었지만 나는 나의 계획을 장황하게 설명하며 전달했다. 그리고 내 계획 일정에 맞춰 떠나기에 앞서 몇가지 물어봐야 할 것이 있으니 잠시 만나자고 했다.

그런데 자영씨는 요즘 좀 바쁘다며, 만나기는 좀 곤란하니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전화로 이야기하란다. 그토록 친절하고 누구에게나 따뜻했던 그녀의 냉정한 답변이 낯설었지만, 나는 보름 후에 부산으로 출발할 것이라고 통보하듯이 단호히 말했다.

 

이제 다 지나간 일인걸요. 저는 괜찮아요. 너무 애쓰지 마세요.”

 

사랑이 식어버린 사람의 냉기서린 답변처럼, 전화기상으로 메아리되어 울려왔다. 나는 단지 자영씨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싶었을 뿐이라고 덧붙였다.

 

알았어요. 조심히 잘 다녀오세요. 그럼 이만 전화 끊을께요.”

 

그녀의 냉담한 반응에 나는 몹시 당황했다. 그녀는 나의 얘기에 별 흥미를 보이지 않았고, 관심조차 없어 보이는 말투였다.

 

잠시만요... 잠시만요.... 잠시만

 

나는 우선, 전화를 끊지말아 달라고 소리쳤다. 나는 잠시 마음을 진정시킨 후에 호흡을 가다듬고, 하고 싶은 말을 계속 이어갔다. 이 계획은 또한 나 자신의 한계를 실험하는 계획이고, 삶과 죽음이란 도대체 무엇인지 알아가는 과정이며, 구천에 떠도는 환영이를 달래는 길이라고도 설명했다. 우리는 모두 환영이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사람들 아니냐고 했다. 우린 그렇게 서로 연결된 사람들이라고 강조하며, 모두가 다 불쌍한 영혼들이고, 당신도 아프겠지만 나도 아프다고 했다. 하지만 그녀는 다 지나간 일이며, 자신은 괜찮다고만 거듭 되풀이하고 있었다. 나는 내 자신의 본 모습을 찾아 새로운 인생의 전환점을 만들고 싶다고도 설명했다. 그리고 이제 내 얘기는 다 했다고 말했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좀 흥분한 상태로 전화통화를 하고 있었다. 그녀의 써늘한 태도에 당황했던 걸까? 잘 지내시라는 마지막 짧은 인사말을 나누고 우리는 전화를 끊었다. 그래도 자영씨에게 충분히 나의 입장을 전달하고나니 마음은 편해졌다. 처음 사십구재 백두대간 순례 구상이 떠오르기 시작했을 때부터 이 계획을 공유하고 싶었던 첫 번째 사람은 자영씨였기 때문이다. 이제 결정은 내려졌다. 이번 순례는 환영이를 위한 49일간의 영결식이 될 것이며, 다시 새롭게 살아가게 될 내 인생의 출발점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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