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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화다큐에세이

1부 - 2장 (여자친구 자영씨)

by 당당 2021. 11. 9.

2. 여자친구 자영씨

 

환영이의 시신을 수습하지 못한 건 내 잘못이 아니다. 2차 조난을 피하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였다. 더 이상의 조난자를 발생시키지 않으려는, 모두를 위한 선택이었다. 환영이는 그렇게 만년설 속에 묻혀 히말라야 설인으로 남았다. 가르왈 히말라야 깊은 계곡 어느 바위벽에 잠든 환영이, 영원한 침묵의 강을 건넌 그를 남겨두고 우리 원정대는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인천공항에 마중나온 대원들의 가족들은 모두들 오열을 하며 서로 부둥켜 울기 시작했다. 살아서 돌아와 천만 다행이라며 대원들을 위로하는 가족들이 왠일인지 낮설게만 느껴졌다. 그 때 대원들의 가족들과 거리를 두고, 먼 발취에서 흐느끼며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는 자영씨가 보였다. 환영이의 여자친구, 자영씨였다. 자영씨는 누군가의 부축을 받고 거의 쓰러질듯 위태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직장동료이거나 친구로 보이는 여성 한 분이 자영씨의 겨드랑이에 손을 넣어 붙잡고 있지 않았다면, 주저앉을 기세였다. 우리 원정대가 입국장으로 빠져나올 때까지 오랜 시간 거기에 서있었던 것 같았다. 거의 실신한 사람처럼 머리칼과 옷차림이 흐트러져 있었고, 화장기없는 눈자욱엔 눈물로 얼룩져 있었다.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올라서 초췌해 보였고, 부스스한 모습이 몇날 며칠 눈물로 지새운 것 같았다. 그녀는 환영이가 돌아오면 결혼식 날짜를 잡을 계획이었는데 틀어져 버렸다. 결혼을 앞두고 청천벽력같은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얼빠진 사람처럼 서있는 그녀의 상기된 표정을 보는 순간 갑자기 눈물이 쏟아질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호흡을 크게 가다듬으며 시선을 피했다. 그녀는 나를 보더니 대뜸 그를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나에게 꼭 찾아달라고 애원하며 매달렸다. 맥빠진 사람처럼 횡설수설거리듯 거듭 당부하며 약속해달라는 말만 되풀이 했다.

 

성정씨! 시신을 찾을 수 있을까요?”

나는 잠시 머뭇거렸다. 뭐라 말해야 위로가 될지 몰랐다.

인도 현지에서 구조대로부터 연락이 올 겁니다. 인도등산협회에 협조요청을 하고 왔으니까요. 조금 시간이 필요한 것 같아요. 헬기도 띄우기로 했다네요. 눈이 좀 녹아야 수색작업을 할 수 있다고 들었어요. 눈이 너무 쌓여서 시신의 위치를 찾을 수 없는 상황이라고 하네요. 사고지점은 제가 잘 설명해 주고 왔어요.” 나는 그 이상 아무 답변도 할 수 없었다.

 

우리는 자영씨를 부축해서 인천공항 지하 커피숖으로 자리를 옮겼다. 한동안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시간이 지날수록 실루엣처럼 환영이와의 인연이 떠올랐다. 나는 환영이를 북한산에서 만났다. 스무살 봄날이었다. 혼자 바람쐬러 북한산에 갔다가 둘도 없는 인연이 되었다. 홀로 산길을 걷다가 우연히 올려다보게 된 인수봉, 그 우뚝 선 거대한 바윗덩이 산봉우리에 어떤 사람이 매달려 있는 것을 보았다. 암벽등반하는 사람이었다. 인수봉을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경이롭고 신비하기만 했는데, 그곳에 사람이 매달려 있었던 것이다. 환영이는 그 때 북한산 인수봉에서 암벽등반을 하던 그 사람이었다. 나는 실제로 암벽등반하는 모습을 처음 보았는데, 그 때 나는 암벽등반하는 사람들의 모습에 매료되어 사로잡혀 버렸다. 드디어 내가 세상에 태어나서 할 수 있는 가장 멋진 취미를 찾아낸 순간이었다. 나는 오솔길을 헤쳐 암벽등반하는 곳 근처로 다가갔고 거대한 바위 암벽에서 하강하던 사람에게 먼저 말을 걸었는데 그 사람이 환영이였다. 환영이는 헬멧을 쓰고 안전벨트와 암벽화를 신고 있었다. 나는 모든 것이 신비롭고 경이로와 보이는 그들에게 다가갔고, 궁금하던 몇 가지 질문들을 하는 과정에서 그도 스무살 동갑내기인 것을 알게 되었다. 환영이는 그 자리에서 본인이 소속한 산악회 선배들에게 나를 소개시켜 주었고, 나는 즉각적이고 흔쾌히 암벽등반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선배들은 다음 주부터 산에 나오라고 말했고, 우린 그렇게 산친구가 되어 5년동안 깊은 우정을 쌓아 왔다. 환영이는 언제나 나의 자일파트너가 되어 생사고락을 함께 했다. 180cm가 넘는 키에, 80kg이 넘는 거구, 어깨가 딱 벌어져서 체격도 좋고, 힘도 장사였다. 환영이는 와일드하고 화끈한 성격에 유머감각도 뛰어났다. 턱 부근부터 관자놀이까지 더부룩히 구렛나루까지 자라고 있었기에 상남자다웠다. 자영씨랑 함께 있을 때면 자영씨가 두 살 연상임에도 환영이가 더 나이가 많아 보였기에, 아주 자연스럽고 잘 어울려 보였다. 나는 사랑에 빠진 여자의 눈빛이 어떤 것인지 그녀를 통해 처음 알았다. 그녀는 가끔 환영이가 과하게 행동하거나 허세를 부려도, 항상 웃어주며 환영이의 모든 부분을 존중하고 믿고 의지하는 사람이었다. 나도 언젠가는 자영씨처럼 맘씨 좋는 여자친구를 사귀리라 다짐하게 해준 사람이었다.

 

커피를 마시며 마음이 좀 진정된 것 같은 자영씨는 나에게 환영이의 유품을 보여달라며, 해외에서 가져온 환영이의 물품을 보고싶어 했다. 나는 원정대 공동물품 중에서 이미 자영씨에게 전달할 유품들을 입국전에 구분해 두었었기에, 자영씨에게 전달할 유품목록들을 가져와서 전달해 주었다. 유품 중에는 환영이가 인도의 수도 델리에서 구매한 몇 가지 선물들과 자영씨에게 전달할 일기장, 옷가지류와 장비들, 그리고 수신자가 여러 사람인 몇 편의 밀봉된 편지와 출국전에 미리 써 놓았었던 유서 등을 전달해 주었다. 자영씨는 환영이의 유품 중에서 일부를 가지고 사십구재(四十九齋)를 치루기로 했다고 말했다. 환영이의 고향인 경상북도 예천의 깊은 산속의 서악사(西岳寺)라는 작은 절에다가 이미 준비를 해두었다고 했다. 혼외자였던 환영이 하나만 낳아 홀로 키워온 어머니와 함께 마련했다고 말했다. 환영이의 어머님은 불교신자라고 했으며, 자영씨도 그 곳 산사(山寺)에 머무르면서 마음을 추스르려 하는 것 같았다. 사십구재가 뭐냐고 물었더니, 이승의 한을 달래주고 저승길에 불을 밝혀 주는 것이라고 설명해 주었다. 구천에서 헤매지 말고 곧장 저승길로 돌아가서 좋은 곳으로 환생하도록 도와주는 의식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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