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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창작실

시베리아 횡단열차 (시)

by 당당 2020. 11. 10.

[시베리아 횡단열차]

 

나의 유전자는 5천년이 아니야.

한민족의 시원이 맞닿아 있는 이르쿠츠크 바이칼호수

나를 닮은 알혼섬 푸른눈 부랴트족 샤머니즘과

고조선 단군신화의 자랑스런 후예도 아니고

 

블라디보스톡 우수리스크 최재형 안중근 이상설과

연해주 한인들의 잔인하고 처절했던 독립운동사가

지평선 넘어 저물어가는 노을의 마지막 절정에 타오르면

열차침구에 누워 태초의 기원에 빨려 들어가게 되더라구.

 

강제이주정책에 떠밀려 라즈돌로예역으로 내팽겨쳐진

고려인들의 끈질긴 연명이 마을에 손주까지 남겨두며

살아남기 위해 살아가기 위해 살아낸 선조들의 뿌리가

기찻길을 따라 흐르고 흘러 전설이 되지 않았다면

 

발해 고구려의 흔적과 아무르강 하바롭스크 이주한인도

노보시브르스크 알타이산맥 넘어 예카테린부르크 우랄산맥까지

모스크바 상트페테부르크 지나 유럽 아프리카로 진출했던

선조들의 자취가 그 가슴에 서리지 않았다면

 

지구 반바퀴 일만이천 킬로미터 시베리아를 가로지르며

레일위에 꼼짝없이 묶여 일주일 내내 차창밖으로 펼쳐진

자작나무숲과 황량한 대륙을 하염없이 넘보다가

미치지 않으면 까무러쳐 버리는 거지. 환장할 노릇이야.

 

정작 2차대전에서 이천만명을 잃은 러시아의 피맺힌 한()

광장의 꺼지지 않는 불꽃과 기념관 비석에 빼곡히 새겨진 이름으로

얼어붙은 땅 버려진 땅 쓸모없는 땅에서도 예리하게 빛나고

내가 태어난 원인은 나의 부모보다 먼저 그 이름뒤에 숨어서

 

그 이전의 이전부터 아버지의 아버지 때부터 산넘고 바다건너

에스키모인 인디언의 역사에도 내 몸이 반응하고 있음을 보면

나의 조상은 네안데르탈인을 등에 업은 호모사피엔스와

남자의 갈비뼈로 만들었다는 이브의 신화까지도 가야해.

 

그러니까 나의 유전자는 5천년이 아니야.

 

(2020.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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