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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배움

죽음이라는 환상과 구원에 대하여

by 당당 2020. 9. 29.

 

   나는 죽음이라는 개념이 하나의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몸에서 생명이 떨어져 나가는 것이 ‘죽음’이라고 믿는 사람들에겐 납득하기 어려운 주장일 수도 있겠지만, 육신이 사라지는 것이 곧 죽음을 의미하진 않는다. 그것은 하나의 착각에 불과하다. 그저 육신이 곧 ‘나’라는 생각에 지나지 않는다. ‘육신=나’의 등식은 착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라고 하는 정체성은 오직 육신에만 머물러 있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이유로든 죽음이 실재한다고 정의한다면 생명도 없는 것이다. 그들이 정의하고 있는 죽음은 생명을 부정한다. 하지만, 몸을 벗고 실재의 빛이 오면 그런 환상은 물러간다. 육신은 한갓 상징일 뿐이다. 마음과 정신, 영혼을 품은 ‘나’라는 생명의 존엄이 몸을 벗어던지고 또 다른 길로 들어서는 것이다.

 

 

   삶과 죽음을 어떻게 분리할 수 있겠는가. 생명이란 사라지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태어남은 시작이 아니며 죽음도 끝이 아니다. 그 모든 물질에너지는 파동이며 사라지는 성질의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현대과학은 증명해 내고 있다. 특히 현대 물리학에서는 생명의 특성을 수축, 변형, 해체, 분해, 조립, 재창조의 과정이라고 밝혔다. 불교계의 반야심경에서는 ‘색즉시공공즉시색(色卽是空空卽是色)’이란 표현도 있다. ‘색이 공과 다르지 않고 공이 색과 다르지 않으며, 색이 곧 공이요 공이 곧 색이다’ 로 번역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나타났다 사라지는 현상학적 배경에는 보이지 않고 해석하기 어려운 개념들이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일부 크리스찬들이 주장하는 구원의 방식에 양심상 동의하지 않는다. 부활이 어느 하늘 높은 곳으로 들여 올려진다는 것도 믿을 수 없다. 그들은 어느 특정 공간으로의 이동을 말하고 있으며, 오직 하나님 말씀 잘 들어야 구원받을 수 있다는 논리다. 특히 ‘예수천국, 불신지옥’ 이라는 이분법적 구원론은 위험하기 그지없다. 이는 사람들을 혹세무민(惑世誣民)케 하는 구시대적 방식이다. 선량한 시민에게 죄의식을 심거나 공포심을 조장하여 두려움의 삶으로 몰아가려는 폭력이 아닐 수 없다.

 

 

   만약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라면, 죄는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신의 아들딸들이라면 죄의식도 조작된 것이다. 이것은 중세기 면죄부 이야기와 다를 바 없는 얘기다. 죄인으로 규정해서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교류를 박탈하려는 음모다. 하지만 사랑의 하나님은 그것을 원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너 자신을 알면 하나님을 보는 것이다” 성경 곳곳에도 들을 귀 있는 자들만 들을 수 있고, 볼 수 있는 자들만 볼 수 있는 밀어들이 숨어 있다.

 

 

   구원이란, 심판하고 벌책하는 절차가 아니라 원상태로 되돌리는 것(undoing)일 뿐이다. ‘나’라고 하는 육신의 관점에서는 분리된 세상, 서로 무관한 사물들, 아무런 의미도 없는 사건들을 보게 되겠지만, 구원이란 이 모든 것을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릴 것이다. 그대가 경험했던 세상, 끝까지 추구했던 집착들, 그대의 우주를 지워버리고, 육안으로써는 결코 볼 수 없었던 또 다른 세상을 보게 해줄 것이다. 태초의 그 자리, 내 본향의 품으로 회귀하는 것이다.

 

   구원은 언제나 당신이 바로 지금 내리는 결정으로 귀착된다는 것. 여기서 벗어날 길은 없다. 매순간 날마다 하루하루를 어떻게 사느냐가 구원의 형태와 방식을 결정한다. 우리의 의식상태, 언행들, 습관과 생활방식들은 구원과 직결되어 있다. 지금 이 순간 여기서 즉각 이루어지는 결과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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